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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은 다산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던 해였습니다. 바로 앞 해에 학자 군주이던 정조께서 붕어하자, 가장 사랑받던 다산에게는 큰 불행이 겹쳐서 오고 말았습니다. 보호해주고 견제해 줄 후원세력이 없던 다산의 주변은 온통 창칼을 들이밀면서 다산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온갖 모함과 중상을 거침없이 해댔습니다. 이른바 신유교옥(辛酉敎獄)이라는 대 옥사(獄事)가 일어나 신서파(信西派)라는 다산 일파들은 일망타진 되는 불행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한해에 두 차례나 감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당했고 오랜 귀양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십대 초반의 당당한 벼슬아치 다산은 임금의 신임을 등에 업고 팔팔 날아가는 권력의 지위를 얻었으니, 다름 아닌 암행어사의 활동이었습니다. 경기도 북부의 연천군 등 4개 고을의 민정을 살피고 관원들의 잘잘못을 가리라는 임금의 명령으로 어사출두의 신나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궁중의 어의이던 강명길이라는 전직 원님의 비행과 궁중의 지관(地官)이던 김양직이라는 전군수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내고, 경기도 관찰사이던 서용보라는 사람의 비행까지를 밝혀 상세하게 임금께 보고하여 그들이 처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사(私)는 버리고 공(公)에만 입각해서 탐관오리들의 비리와 악행을 빈틈없이 들춰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처벌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의와 지관이라는 임금의 최측근인데다, 서용보라는 세력가는 권신이었기에,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처벌하기가 어렵다는 당로자(當路者)들의 반대에, 다산은 굴하지 않고 곧바로 임금에게 직보(直報)를 올렸습니다. 임금님, 사적으로야 그들을 어떻게 처벌하겠습니까마는 임금의 권력은 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공적으로 행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들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을 적용하려면 마땅히 임금님의 최측근부터 적용해야 한다(用法 宜自近習始)”고 아뢰었습니다. 그게 바로 공적으로 법을 집행하라는 천하의 명보고서를 올렸던 것입니다. 다산 못지않게 현명했던 군주, 정조는 다산의 참으로 옳은 보고서에 감동되어 그들에게 중벌을 내리고 말았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던가요.
정조의 붕어 뒤, 정승에 오른 서용보는 마침내 신유옥사의 재판관이 되어 다산에게 무서운 보복을 감행했지만, 다산을 죽이지는 못했고, 오히려 긴 유배생활로 겨를을 제공해주어 학문적 대업을 성취하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말았습니다. 사적으로야 서용보는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는 역사의 필주를 받았으며, 일생동안 다산에게 보복했던 죄악으로 역사적 비판은 지금에도 벗지 못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별했던 정조와 다산, 그것과는 반대로 권력을 사적으로 집행하는 요즘 통치자의 사면권 남용을 목격하면서 참으로 개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최측근부터 벌을 주어야 옳은 일인데, 최측근은 모두 사면해 준다면 그게 어떻게 공권력의 집행이 되는가요. 공과 사를 구별하지도 못하면서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통치자가 있으니 이 나라의 형편이 너무 딱하기만 합니다.
박석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