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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카우아이 섬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연령미달임이 탄로가 나서, 나이 든 노동자들보다 일은 오히려 많이 했는데도 첫해에는 2달러 적게, 월 16달러 밖에 받지를 못했다고 한다. 권도인씨는 나중에 부유한 사업가가 된 후에도 이일을 회상하면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19세 때 호놀룰루로 가서 가구점에서 견습생이 되어 가구제작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생계대책이 좀 서자 당시의 다른 이민노동자들처럼 사진 교환을 통해 신부를 데려와서 대구출신의 이희경씨와 결혼했다고 한다.
1894년생인 이희경씨는 대구에서 선교사들이 설립한 신명여중의 1회 입학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2년에 하와이로 시집을 갔는데, 이희경씨 역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미국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을까하고 갔지만 배에서 내리자마자 결혼식을 하고 가난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젊은 청년의 사진을 보고 정혼했다가 하와이에 도착해 보니 신랑이 40대, 50대여서 비참했던 많은 사진신부들에 비하면 여섯 살 연상의 의욕적인 남편과 결혼한 이희경씨는 운이 좋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희경씨는 곧 실망을 떨치고 빈한한 신혼생활 속에서도 다른 한국여성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해서 매주 떡과 잡채, 산적 등 음식을 만들어 팔아서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1918년 말에 3•1독립운동자금 10만불을 만들어서, 네 살 먹은 딸을 친정부모님께 보여주기도 할 겸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지한 미화가 세관에서 적발되어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돈은 몰수당하고 수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타깝게 3•1운동의 소식을 옥중에서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2년 후에 석방이 되어서 하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부부는 그 후 세 명의 아이를 더 두어서 네 자녀를 길렀고,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날, 자녀를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던 (이때 혼자되었던) 권도인씨는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좌절과 고된 현실을 애국으로 승화
머리가 좋고 아이디어가 풍부했던 권도인씨는 가구제작업자로 크게 성공해서 하와이 최상류층 인사들의 가구를 주문제작하고 늘 새로운 발명품을 궁리해서 가구에 관한 특허를 40여개나 땄다고 한다. 그의 발명 아이디어는 하와이 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활용되었는데 특히 2차대전 중에 그가 제작한, 공습을 피하기 위해 불빛은 새어나가지 않으면서 환기는 되는 커튼은 큰 힛트 상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이디어 개발에만 골몰해서, 직물소파 바느질이나 종업원 관리등 사업은 부인 이희경씨가 맡아서 했고, 그의 사업이 수익을 낸 것도 부인의 관리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희경씨는 남편의 사업을 위해 공장에서 일을 하는 한 편 독립자금모금과 교회에서 한글 가르치기 등 한인사회를 돕기 위한 일도 헌신적으로 했는데 권도인씨는 부인이 집 밖에서 많은 일을 하고 돈을 기부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사업이 성공하면서 대한인국민회의 간부를 역임하며 많은 독립자금을 내 놓았다고 한다. 이희경씨는 한국이 독립한 2년 후인 1947년 교통사고로, 50대 초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권도인씨는 1962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한국정부가 이 부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를 인정해서 훈장을 수여하고 대전현충원에 안장을 제안했을 때 한국에 자주 성묘를 올 수 없는 자녀들은 망설였지만 조국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염원을 아는 터라 결국 온 가족의 합의로 2004년에 대전으로 부모를 이장했고, 올 10월 초 막내딸 에스터 여사가 완성된 묘역과 묘소, 그리고 비석을 보기 위해서 84세의 나이를 무릅쓰고 내한했다.
후손의 감격과 안도
에스터 여사는 수많은 애국영령들과 함께 잠든 부모의 완성된 묘와 부모의 공적사항이 쓰여 진 비석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와 체력으로 다시 방한은 어렵겠지만 부모가 그토록 잊지 못하던 조국의 품안에서 잠들었고 조국이 부모의 애국심을 인정해서 그들의 묘를 관리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무한히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참배가 끝난 후 대전예술문화회관에 나들이를 갔는데 10월의 첫 토요일을 즐기러 나온 인파가 엄청나게 많았다. 에스터 여사는 한국이 발전해서 지방도시에도 아름답고 멋진 문화회관이 있고 문화를 향유하러 나온 가족이 많은 것을 보고 너무도 흡족해 했다.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문화수준도 높다는 생각이 한국의 장래에 대해 낙관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애국혼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재산을 바쳐 독립을 지원했는가를 망각하고 산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키고 화합하며 내실 있게 살아야할 우리의 도리를 너무 쉽게 잊고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