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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더디 갔고 더디 왔다. 동지사가 북경을 갔다고 오는 데 6개월이 걸렸다. 또 북경에서 항주까지 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따라서 항주에서 다시 답신을 보내면 꼭 같은 시간이 걸렸으니, 아무리 빨라도 1년을 넘어야 받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중간에 메신저를 맡은 사람이 아무런 사고가 없어야 했다. 서광정과 손유의가 다른 지방으로 가 있으면, 편지는 사람의 손을 떠돌다 몇 해를 넘겨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주고받은 편지 중 엄성․반정균, 육비 등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담헌이 보낸 편지는 『담헌서』의 ‘항전척독(杭傳尺牘)’에 실려 있다. 물론 이 편지도 온전히 남은 것은 아니다. 그 남은 편지만 읽어보아도 담헌과 엄성 등의 깊은 우정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담헌은 편지에서 중국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펼쳐내면서 오직 학문과 자기 수양에 힘쓸 것은 권유하고 있다.
담헌은 중국인 친구 중 엄성과 가장 가까웠다. 엄성은 과거에 낙방하자, 고향 항주로 돌아갔고 1768년 복건성에서 학질에 걸려 죽었다. 엄성은 병이 위독할 때 담헌이 예전에 선물한 조선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고, 사람들은 그 먹을 관에 넣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반정균은 편지를 통해 엄성의 죽음을 전해들은 담헌이 비통해 했던 것을 말할 필요조차 없다. 담헌은 제문을 지어 손유의에게 보냈고, 손유의는 그 편지를 다시 항주로 전했다. 담헌의 제문이 도착한 날은 엄성의 대상(大祥)날이었다. 엄성이 친구의 제문을 기다렸던 것이다.
손으로 쓴 편지의 감동 …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담헌은 엄성이 너무나 그리웠다. 1769년 경 항주로 편지를 보내 엄성의 유고(遺稿)와 초상화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 1778년 이덕무가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손유의를 만나 항주에서 온 유고와 초상화를 받아온다. 담헌이 부탁하고부터 꼭 10년이 걸린 것이었다.
매일 아침 이메일을 열어본다. 스팸메일이 가득하고, 중간에 더러 소용이 닿는 메일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담헌이 엄성 등에게 보냈던, 엄성 등이 담헌에게 보냈던 그런 편지는 없다. 손으로 쓴 편지를 받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한 자 한 자 쓰면서 친구를, 연인을 그리던 그 시간과 설레임은 이제 깡그리 증발하고 만 것이다.
엔터키를 치는 순간 나의 이메일을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을 편지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속도 속에서 담헌과 엄성의 우정이 있을까? 죽은 친구의 초상을 걸어놓고 그리워하던 그 마음이 있을까? 초가을에 담헌의 편지를 읽는 마음이 무한히 쓸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