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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산 회혼례(回婚禮)에 바친 찬사 [박석무]

문근영 2012. 10. 27. 00:07

다산 회혼례(回婚禮)에 바친 찬사

1836년 4월 7일은 다산선생께서 75세로 서거한 날이자 결혼 60주년을 맞는 회혼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산은 회혼례를 치루지 못하고 몇 시간 전에 영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안타까움을 잊지 못해 우리는 8월 5일 다산 탄신 250주년을 맞아 그 하루 전인 4일에 다산이 사셨던 「여유당」 뜨락에서 회혼례를 재현하는 행사를 치렀습니다.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여 참으로 성대한 행사를 치렀습니다. 금년 최고 폭염의 날, 선생의 7대 종손 내외가 신랑과 신부가 되어 격식과 전례에 꼭 맞는 회혼의 의식을 올렸습니다. 지하에 계신 선생께서도 아마 이만하면 “흐뭇하다”라고 만족하게 여기는 미소를 지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나라 안에서보다는 세계가 알아주는 선생, 유네스코의 2012년 기념인물에 선정된 것과 함께, 당시 다산이 살아계시던 그때 평가를 이런 기회에 살펴보고 싶습니다. 다산은 본디 당파로는 남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안고 고향으로 귀향한 해배 후의 삶에서는 반대당인 노론계 쪽에서 다산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안동 김씨이던 대산 김매순(金邁淳 : 1776-1840)이 다산의 저서를 읽은 뒤 극찬하였고, 풍산 홍씨이던 홍석주·홍길주·홍현주 3형제가 유독 다산을 존경하면서 잦은 내왕으로 학술적 토론을 계속하였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홍석주는 대제학을 지내고 좌의정에 오른 나라의 대신이었고, 홍길주는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였으며, 홍현주는 정조의 외동사위이자 순조대왕과는 동복 처남 남매간 이었습니다. 순조의 동복누이 숙선옹주의 남편이자 특히 시문에 뛰어나 큰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습니다. 문장가 홍길주가 다산의 회혼일을 맞아 그날 세상을 뜨리라는 예견을 전혀 못하고 건강할 때의 다산을 생각하면서 올린 회혼 축하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산선생은 우주를 꿰뚫을 만큼 박식하고, 두루 깨달아 아무리 미세한 일 조차도 철저하게 알아냈다. 축적된 앎이 드넓고 다루는 분야가 넓어서 무엇이든 훤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몇 십 년이나 버려서 강가에서 한가롭게 노닐게 하였지만 벼슬은 내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혹자는 ‘운명이 참으로 궁하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丁茶山承旨回巹壽序)

첫째, 75세 76세의 노부부가 회혼을 맞는 날까지 이렇게 건강하시니 이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궁하게 살면서도 늙도록 저술에만 몰두하여 도서(圖書)·상수(象數)의 오묘한 이치에서, 구경(九經)·백가(百家)·문자와 명물(名物)의 풀이, 병법·농법·정치제도·치민(治民)·옥사(獄事)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니 이런 행복이 무엇에 비교되겠는가. 셋째, 두 아들과 네 손자가 모두 학문이 높고 글 잘하는 자손이니 이런 행복한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효우(孝友)하는 집안인데서랴.

사후 250주년에 받는 칭송과 존경에 못지않게 당대에 그런 높은 평가를 받은 다산, 역시 옳고 바르게 살아간 학자의 삶은 생전은 물론 천년 뒤에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산을 통해 알게 됩니다. 이제 남은 우리들, 선생의 간절한 애민·목민정신을 실천하는 일만 과제로 남았습니다.

박석무 드림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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