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과 깊이
오 규 원(1941 ~ 2007)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어제 내린 눈은 어제에만 있지 않고 오늘 위에도 쌓여 있다. 그 눈은
여전히 희고 부드럽다. 소중한 것은 잊혀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오늘
에도 있다. 흰 눈이 펑펑 내려 눈부셨고, 그 눈이 하얗게 쌓여 여전히
눈이 부셨던 그 다음 날, 지난 2월 2일은 오규원 시인이 타계한 지 5
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누구는 그를 여전히 생각하고 있고 누구는 그
를 잊었다. 그의 제자들과 그를 아끼는 한국 문단이 모여 추모 5주기
낭송회를 열었다. 조촐했지만 많은 사람이 극장 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와서 그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시인이 찍은 발자국의 깊
이를 들여다보고 싶어 했다. 나무를 타고 허공 속으로 날아가 자신을
지워버린 시인, 그 발자국을 들여다보는 일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
은 허공처럼 눈이 부셨다. <최정례 . 시인>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꽃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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