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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광헌] 어머니가 쓴 시 / 어머니의 달리기

문근영 2011. 12. 27. 11:35

어머니가 쓴 시

 

고광헌

 

 

어머니

머리에 보자기 두르고

학교 오시던 날

 

누런 보리밭 옆 운동장으로

5월 하늘 새까맣게

무너지던 오후

 

더이상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쪽 풀린 어머니의 검은 머리칼

서울 와서

가발공장 여성노동자

데모에서 보았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수업료

 

그때

어머니 전생애를 잘라

조용히 머리에 두른 것이다

 

 

 

 

 

 

어머니의 달리기

 

고광헌

 

 

어느 봄날

앞집 굴뚝 밥 짓는 연기 오를 때

방장산 장군봉 봄나물 따러 간

어머니 기다리다

붉은 해 지는 것 보았네

 

달팽이처럼 

무릎 턱밑까지 말아올리고

마룻바닥에 쓰러져 

잎 트기 시작한 탱자나무 사이로

배고픈 해 지는 걸 보았네 

 

노랗게 봄 독 오른 가시에 

마알간 얼굴 긁히며 쓰러지는

검은 한낮을 보았네 

 

쌀 없는 저녁 밥상 차리러

봄나물처럼 달려오던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의 싱싱한 달리기 이길 수가 없네

 

 

 

-시집『시간은 무겁다』(창비, 201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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