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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 산] 어쩌면 허허벌판 / 은하야 사랑해

문근영 2011. 12. 26. 20:06

 

어쩌면  허허벌판

 

 

김 산

 

 

 

흰파랑양떼구름을 몰며 유랑하는

내 이름은 허허벌판

허리에 큰 헬륨 풍선을 달고 한걸음에

열 나무씩 열 우물씩 지나쳐 간다

자줏빛왕벚꽃이 피고 지고

상수리 숲을 지나

벌판을 허허로이 거닐면서 나는 생각 생각 생각

도무지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벌판은 아직도 찬란해서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입속으로 열 통의 편지와 열 개의 대륙이

소용돌이치고 나는 조금 배가 고프다

이제는 그래서 흰파랑양떼구름을 몰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구름과 아무 일 없었던 구름을 몰고

나는 집으로 간다

귀가 세 개인 토끼도 뿔 달린 얼룩말도 없는

나의 집은 어쩌면 허허벌판

옆의 벌판에선 다리가 세 개인 아버지가

지팡이를 벗고 TV를 보고

뿔 달린 어머니가 냄새나는 양말을 꿰매고 있다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모든 세상의 이름은 허허벌판

도무지 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녁

희한하게도, 그런, 벌판 벌판 벌판

 

 

 

 

 

은하야 사랑해

 

 

 

 

 

그러니까 이것은 호외

 

내 탄생별에 대한 예우

 

이탈자의 최후의 고해

 

양을 잃은 소년의 피리

 

주석이 필요 없는 행간

 

썼다 지우고 다시 쓴 참회

 

날 닮은 별에 대한 역사

 

내 무릎을 떠받치는 천체

 

모든 점멸에 대한 묵념

 

그러니까 너는 내 운명

 

 

 

 

 

 

 

-시집 『키키』(민음사, 2011)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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