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허허벌판
김 산
흰파랑양떼구름을 몰며 유랑하는
내 이름은 허허벌판
허리에 큰 헬륨 풍선을 달고 한걸음에
열 나무씩 열 우물씩 지나쳐 간다
자줏빛왕벚꽃이 피고 지고
상수리 숲을 지나
벌판을 허허로이 거닐면서 나는 생각 생각 생각
도무지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벌판은 아직도 찬란해서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입속으로 열 통의 편지와 열 개의 대륙이
소용돌이치고 나는 조금 배가 고프다
이제는 그래서 흰파랑양떼구름을 몰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구름과 아무 일 없었던 구름을 몰고
나는 집으로 간다
귀가 세 개인 토끼도 뿔 달린 얼룩말도 없는
나의 집은 어쩌면 허허벌판
옆의 벌판에선 다리가 세 개인 아버지가
지팡이를 벗고 TV를 보고
뿔 달린 어머니가 냄새나는 양말을 꿰매고 있다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모든 세상의 이름은 허허벌판
도무지 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저녁
희한하게도, 그런, 벌판 벌판 벌판
은하야 사랑해
그러니까 이것은 호외
내 탄생별에 대한 예우
이탈자의 최후의 고해
양을 잃은 소년의 피리
주석이 필요 없는 행간
썼다 지우고 다시 쓴 참회
날 닮은 별에 대한 역사
내 무릎을 떠받치는 천체
모든 점멸에 대한 묵념
그러니까 너는 내 운명
-시집 『키키』(민음사, 201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전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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