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채석강에서
진란
그를 다시는 펼쳐보지 않으리라고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지 않았다
밀려왔다 푸르릉 피어나는 물거품도
서로 꼬리를 물고 사라지는 이무기의 꿈만 같아
수십리 밖으로 펼쳐진 모래톱에서는
해무가 시나브로 일어나나니
칠천만 년동안 아무도 펼치지 않았다는
이백의 서재를 엿보기나 하였다
선캄브리아대를 지켜온 할배도 눈웃음으로
천 탑을 쌓는 중이라고 했다
고서를 펼쳐보는 이 하나 없어도
갯벌을 뚫고 나온 달랑게들이 눈봉을 곧추세우고
따개비들도 푸른 바다를 꿈 꾸는 밤
1984년 그 해 가을의 해국은
지금도 책 갈피에 보랏빛 곱게 꽂혀있는지
희끗해진 꽃이파리 날근해져 날아가 버렸는지
차마, 아래 눌린 책을 꺼내 보지 못하고
바다를 꿈꾸는 밤이 무거워지는 생이다.
-계간『주변인과시』 (200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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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문인수
채석강에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 벼랑에
격랑과 고요의 자국이 차곡차곡 쌓였는데
종種의 기원에서 소멸까지
하늘과 바다가 전폭 몸 섞는 일.
그 기쁨에 대해
지금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
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각다귀들의 분분한 흘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바닥 모를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피어라, 석유!』(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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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마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 정호승 지음『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램덤하우수코리아, 2006)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2』(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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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스캔들
서규정
책은 옆구리로 읽는 것이다
등뼈 부러지는 소리로 허리를 펴도 펼 소나무는 어기적어기적 한 뿌리는 이미 바다 쪽으로 던진 채석강을 찾아 가리, 길을 잡아주던 길잡이보다 길잡이를 끝낸 곳에서 허리 굽힌 동네머슴이 되리니
엎드려 일만 하고서도 담배 한 개비면 충분한, 뽐뽐뽐 통통배 연기배 맞춰 해거름에 들어가면 고봉으로 밥상 차려놓고 부엌문 뒤로 살짝 숨은 손, 그 손은 달랑 한 장의 거친 겉장 같지만 더듬어 읽어갈수록 따뜻한 속살의 책을 온밤을 채워 거푸거푸 읽었듯이
나 그렇게 채석강에 가면 옆구리로 읽어낸 한 사람이 억 만권 장서 속에 비릿하게 묻혀 있으리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신생,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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