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자궁
홍순영
집 앞 벚나무가 오늘 정수리 뾰족한 잎사귀 아이들을 수십 명 낳았다
꽃도 낳고, 열매도 낳고
심지어 새들까지 낳는,
출산을 멈추지 않는 저 싱싱한 자궁
나무가 도마로 다시 태어났을 때
가장 두려워한 것은 철썩, 부딪쳐오는 목숨
낯선 살점을 떼어먹는 동안, 자신의 생살도 내주어야 하는
우로보로스*의 고리에 목이 꿰인 것
비명으로 떠나간 얼굴들 대부분은 원색주의자
도마는 좀체 가시지 않는 냄새를 삼키며 남은 생을 견딘다
그녀가 젖은 도마를 가스 불에 말리고 있다
팔이 아프도록 이리저리 돌리는 사이, 스며든 화기에
도마는 얼마쯤 화상을 입었을지도.
달구어진 도마가 숲을 떠올릴 때, 발등 위로 푸른 딱지가 내려앉는다
나이테를 박음질하는 빗소리 들려오고
한 그 나무로 빗물을 받아먹던 기억이 팽팽해진다
어미를 추억하며, 우묵한 곳에 머리를 묻고 싶은 날것들
도마 주변을 기웃거리는 동안
어둑하니 깊어지는 몸
그 속으로 다시금 한 무리의 살내음이 밀려드는 시간,
잘게 부서지고 으깨져 스며든다면, 나무의 자궁 속으로 회귀할 수 있을까
건조했던 도마에 다시 물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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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어로 ‘꼬리를 삼키는 자’란 뜻, 불교에선 윤회를 의미,
바퀴처럼 끝없이 회전하는 원형적 이미지로 영원성을 의미한다.
『시와 미학』(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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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 / 인천 출생.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2011년《시인시각》신인상 당선.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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