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서정춘 (1941∼ )
말이 달린다
다리다리 다리다리
말이 달린다
디귿리을 디귿리을
말이 달린다
ㄷㄹㄷㄹ
-《현대문학》2011년 12월호
**말의 몸통과 다리가 두 행으로 구분돼 달리고 있다. 말을 받쳐주는 다리가 디귿리을로 변주되면서 무릎과 발목의 꺾임이 한글의 자음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규칙적으로 다리를 바꾸며 달리는 말의 운동성은 ㄷㄹㄷㄹ이라는 자음으로 한층 시각화된다. 번다한 수사를 모두 제거한 이 시의 묘미는 ‘달린다’라는 동사에 있다. ㄷ과 ㄹ로 이루어진 음절이 말의 관절을 상징하는 부호가 돼 행간의 여백을 향해 뛰면서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다.
초원을 달리는 야생말의 동작 하나하나가 ㄷ과 ㄹ에 담겨 시에 동적 움직임을 부여한다. 따그닥 따그닥, 말 달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 음악적 감각까지도 동반하고 있다. 극서정시의 묘미는 이런 데 있다.
우리 시가 극소 지향을 추구할 때 이런 형태를 띠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말이라는 이미지만을 제시하고 아무런 설명적 어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문면 속에는 말이 달리며 내는 거친 숨소리와 바람결까지도 내재하고 있는 듯하다. ㄷ과 ㄹ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이다. 한 획 한 획마다 관절의 꺾임이 들어 있다는 점은 한글 자음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정철훈 (시인)
-[국민일보] 아침의 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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