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김기택
달팽이 지나 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자리를 견디고 있다.
ㅡ시집 『소』(문학과지성사, 2005)
**무언가 지나간 자국, 천천히 오래오래, 거칠게, 삶을 긁은 자국이 얼룩이다. 얼룩은 새로운 길 앞에서 금방 지워지기도 하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이 되기도 한다. 삶은 원치 않아도 늘 새로운 길을 가야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해야 한다. 달팽이의 물렁물렁함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고, 마른자리를 적셔 길을 내듯, 우리도 그렇게 견딘 얼룩이라는 기억을 먹고 살아간다. 지워지면 지워지는 대로 남으면 남는 대로 물렁물렁하고 축축했던 것이 얼룩의 실체라고 견고하고 깊이 있게 노래하는 이 시, 시인은 늘 약자 편에 서있다. /권정일·시인
- 국제신문[아침의 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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