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
찾아 가는 길이 좋은 봉두산 산행기
언제부턴가 동리산이 봉두산(752.5)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태안사 일주문은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란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동리산이 제대로 이름을 넘겨주지는 않았나 보다.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을 건너 이 곳으로 들어오는 입구 마을인 동계리도 오동나무 동(桐)자인 동리산 계곡 마을이란 뜻이다. 예로부터 봉황은 오동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했으니 동리산이나 봉두산이나 봉황에 얽힌 이야기는 매 한가지이다.
태안사 입구 주막집에서 태안사까지는 무척 호젓하고 고즈넉한 길이다. 계곡을 따라 차 한대 겨우 비켜 갈 정도로 좁은 길이 2km나 이어져 있다. 양편 산줄기가 높아 바지랑대 하나 걸칠 만큼 하늘이 좁은 첩첩 산중이다. 해탈교에서 속세를 벗고, 반야교를 건너 부처님 세계로 다가간다. 헐벗은 나무들의 짙은 음영이 마치 빛바래고 퇴색한 사진을 연상시키지만 추억이 묻어날 것 같은 정겹고 평온한 길이다.
|
 해탈교를
건너 절집을 찾아 가는 아름다운 숲길이 2km나 이어진다.
|
어느 절집을 찾는 길이 다 그러하듯 이 길도 고요 속에서 배어 나오는 깊은 소리가 있다. 부처님의 소리야 우둔해서 들을 수 없지만 중생을 반기는 새소리, 바람소리가 좋고 귓가를 간질거리는 개울 물소리가 좋다. 눈 내리는 날은 후드득 떨어지는 눈 소리가 좋고, 바람 부는 날 나뭇가지 우는 소리가 좋다. 겨울 산사를 찾는 길은 동무 없이 혼자여도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은 겨울 숲이 다 동무가 되기 때문이다.
산굽이를 휘돌아 이어지는 길은 어디고 된장국 냄새가 나는 마음의 고향이다. 더욱이 겨울비에 젖은 낙엽이 쌓인 길을 걸으면 숲과 사람이 온전하게 하나가 되기 마련이다. 산골 마지막 어딘가에는 피로한 육신을 뉘는 안식처가 있을 것이고 사랑을 받아줄 이가 있을 것이며, 그토록 바라는 평온이 거기에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길을 걷는다면 그토록 목말라 하던 사랑도 하나로 이어줄 것이다. 아무리 서로를 위한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많다고는 해도 인공적인 회색공간에서야 어찌 진실성과 영속성이 있겠는가? 때 묻지 않는 자연을 닮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아마 미완으로 남을 것 같다.
초겨울 추위가 기승을 피우더니 봄날 마냥 겨울비가 추적거린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하늘만 믿고 나섰는데 월등재를 넘어 원달 앞을 지나자 안개에 묻힌 산자락에는 처마 낮은 집들이 올망졸망 엎드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난여름의 수고로움이 휴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로를 벗어나 태안사 길을 따라 오른다. 언제 찾아도 정감이 넘친 길이다. 도로가 끝나고 주차장에 다다르면 마른 가지 사이로 계곡을 가로질러 능파각이 누워 있다. 계곡의 바위와 흐르는 물이 함께 어우러져 얻은 이름이다. 계곡을 건너니 다리요, 난간이 있으니 누각이요, 이 곳을 지나면 절간이니 절 문이요 봉황이 봉두산에 산다 했으니 봉황의 집인 셈이다.
|
 능파각은
우리나라 유일의 아름다운 절 다리이다.
|
능파각 난간에 앉아 바위를 쓸고 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면 속세가 함께 소멸되어 간다. 계곡 암반을 축대 삼아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 줄 알았던 선인들의 심미안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신라말
새로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자 선종불교의 깃발을 내세운 구산선문의
첫 절인 태안사 전경
 신라 말기 경문왕 원년(861년)에 만든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보물 제 273호)로 태안사를 처음 창건한 혜철 선사의 부도탑으로 1200년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해 왔다.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을 잘 보여 기단부부터 옥개석과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고수하고 있고, 팔각
연화대 위에 역시 팔각의 부도신(浮屠身)을 얹고 있는 조각기법이 상당히 세련된
부도이다.
|
능파각을 지나 일주문을 들어서면 구산선문의 태안사가 봉두산의 유순한 품에 안겨 있다. 당나라에서 선종의 참선을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와 참선종품을 전파하고자 했던 혜철국사가 국태민안을 지향하며 지은 절집이다. 통일 신라의 영화가 기를 다하며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더 이상 호국 불교에 의해 이상 국가를 건설할 수 없음을 알고 흐트러진 신앙과 사상의 개혁을 위해 선종불교를 일으킨 것이다.혜철은 이곳에 선종사찰을 개창하고 많은 이들에게 깨달음을 가르치고자 했을 것이다. 깨달음이란 배워서 얻은 것도 아니요, 보아서도 아는 것도 아니요, 느껴서 얻은 것도 아니다. 그저 적막 같은 몰아와 무념의 수행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실천 불교인 것이다. 적인선사는 바로 이 곳에 구산선문의 첫 깃발을 올려 천년 깨달음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
 몇
년 전의 배알문
|
 새로
고쳐 지은 배알문
|
혜철선사를
친견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여야 했다. 누구도 이 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낮추고 경건하게 참배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다. 그런
뜻을 져 버린채 이렇게 높고 날렵하게 지어 놓고 배알문이라 했으니
후대의 어리석음을 어찌할꼬?
태안사 계곡을 건너 성기암을 옆으로 하며 외사리재에 오른다. 그 옛날 월등 사람들이 태안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넘던 고개다. 참 스님이 오시던 날 공양미를 한줌씩 안고 이 고개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 덕에 월등은 지금 무릉도원이 된 것일까? 월등이 복숭아 하나로 복된 땅을 얻었으니 말이다.
|

|
안개에 묻혀 산등을 오른다. 산죽에 가랑이를 젖으며 안개 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든다. 모두가 침묵이다. 이런 날 산행은 마치 도를 닦는 기분이다. 한참 오르면 널따란 묘지가 나온다. 어느 후손이 이 곳에 부모님을 모셨는지 복 줄이 후대까지 이어질 것 같은 시원한 명당이다.
이 곳을 벗어나 비탈길을 오르면 정상이다. 안개에 원경이 흐리지만 조계산과 무등산이 보인다. 동으로 백운산 줄기가 안개 속에 누워 있다. 그 너머 지리산 준령이 있을 것이다. 봉두산 품안에는 태안사가 안개 속에 묻혀 침묵이 빠져 있다. 대명천지 밝은 날의 산보다 이런 날이 더 외경스럽기 마련이다.
절재 쪽으로 방향을 잡아 태안사에 닫는다. 무식한 죄로 염치없이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 경찰 충혼탑 앞에 선다. 동족상잔의 어리석은 이념 전쟁에 젊음을 앗겨 버린 마흔여덟 경찰 순국자에게 묵념을 드리고 돌아 섰다.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이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대가를 가슴에 담고나 살고 있는지, 아니면 이념을 앞세워 사상 싸움질이나 하고 있지 않는지 그저 애만 탈 뿐이다.
 48기의
영령들을 모신 경찰 충혼탑
|
 순국의
후손인 이 사람은 시간을 내어 경찰 마크를 닦으며
호국의 뜻을 되새긴다.
|
반야교 건너기 전 조태일 문학관이 있다. 태안사 주지스님의 아들로 태어나 이곳 동계 계곡의 정서를 시로 표현했던 시인의 기념관이다. 계곡을 빠져 나오면 지리산 문화학교가 있다. 예전 동계초등학교에 지리산 사진작가 임소혁씨가 손수 찍은 장엄한 지리산 사진들을 전시해 두고 있다. 임소혁씨는 아직도 해밝은 소년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06.
12. 9 Form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