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 재 소(성균관대 명예교수)
지난 1월 1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 옆에, 높이 7.9m의 거대한 청동 공자상(孔子像)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전에도 2001년 인민대학에 공자상이 세워졌고 2002에는 산동대학에 공자상이 세워진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세워진 동상은 중국을 상징하는 공간인 천안문 광장 바로 옆,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와 비스듬히 마주보는 곳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동안 추방되었던 공자가 공식적으로 다시 귀환한 것이다.
공자 동상,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 초상화과 함께
사실상 공자는 역사적으로 부침(浮沈)을 거듭한 인물이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창도한 유학은 한때 30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렸다고 하는 큰 집단을 형성했으나 당시의 제자백가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다. 공자 자신도 생전에 그의 경륜을 펼칠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진(秦)나라 때에는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하여 참혹한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무제(漢武帝) 때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을 건설한 한무제는 기원전 136년에, 묵가(墨家)나 도가(道家)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특히 계층 간의 신분질서를 중시한 공자의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을 것을 천명했다. 공자 사후 343년만의 화려한 귀환이었다. 여기에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주장한 동중서(董仲舒)의 강력한 건의가 큰 역할을 했다.
이후 공자의 사상은 2000여 년간 중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주도적 사상으로 군림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시대를 초월한 공자 사상의 보편적 가치가 기반이 되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공자를 영입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과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후 공자는 서서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19년의 5.4운동 때는 “공자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당시 중국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된 원죄를 공자와 유학사상에 돌린 것이다. 1949년 모택동의 신중국(新中國)이 성립된 후에도 공자는 복권되지 못했다. 공자 비판이 극에 달한 것은 1966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비림비공(批林批孔)’의 기치아래 홍위병들은 공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제 공자는 중국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듯이 보였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가치, 또는 정치권력의 계산
이런 수난을 겪은 공자가 다시 귀환한 것이다. 그것도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더구나 문화대혁명을 촉발시킨 모택동의 초상화와 마주 보는 자리에 위풍당당한 공자상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공자를 다시 불러온 중국의 의도에는, 봉건시대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 1990년대 급속한 경제적 발전의 부산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로 인하여 계층 간의 갈등이 격화되자 이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공자를 귀환시켰다는 인상이 짙다.
공자는 영원히 살아있는 인류의 스승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에 갖가지 곡절을 다 겪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친 자가 있었다. 인(仁)과 의(義)를 바탕으로 덕치(德治)와 예치(禮治)를 펼치고자 했던 공자의 사상을 중국의 현 지도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할지의 여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오직 어진 자라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唯仁者能好人 能惡人)는 공자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 또 다시 공자를 미워하여 추방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