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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의 맏사위 김현근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현근(金賢根)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의 8세손으로, 순조 대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김이양의 손자이기도 하다. 1810년 진사 김한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23년에 국왕의 사위인 부마(駙馬)가 되었다. 부인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첫째 딸로 태어난 명온 공주인데, 그녀의 나이는 김현근과 동갑이었다. 오늘날에야 열네 살짜리 부부를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10대에 결혼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실력자였던 김조순과 같은 안동김씨 출신으로
김현근은 세 번의 심사 절차를 거쳐 부마로 간택되었다. 후보자로 단자를 제출한 사람이 20명이었으므로, 그는 20대 1의 경쟁을 뚫은 셈이다.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항상 첫 번째로 심사를 받았는데, 이는 사전에 그가 부마로 내정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정국은 김조순이 주도하고 있었고, 김현근은 김조순과 같은 안동김씨 출신이었다. 실제로 김조순은 결혼식을 위해 설치한 가례청의 당상관으로 활동했고, 결혼 의식의 하나인 전안례(奠雁禮)를 김조순의 집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김현근의 원래 이름은 김승현(金承賢)이었지만, 부마로 간택된 날 이름을 바꾸었다. 안동김씨의 돌림자인 ‘근(根)’자를 살린 것으로 판단된다. 같은 날 김현근은 동녕위(東寧尉)란 작호를 받았고, 공주와 결혼한 부마였으므로 1품의 품계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진출할 수는 없었다. 국왕의 사위에게 권력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해 둔 제도적 장치 때문이었다.
김현근은 순조의 사랑을 받던 공주와 결혼했지만, 그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시를 매우 잘 지었다. 그녀는 결혼한 이후에도 오라버니인 효명세자(익종)와 각별한 우애를 나눴는데, 기록에서는 이들이 ‘깊이 사랑했다’고 했다. 그런데 1830년에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사망했고, 공주는 이를 상심하여 병석에 누웠다. 2년 후에는 공주의 여동생인 복온 공주까지 사망하자, 공주는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공주의 나이는 23세에 불과했고, 김현근과의 결혼 생활은 만 9년을 채우지 못했다. 공주는 두 차례 임신을 했지만 끝내 자식을 보지 못했다. 김현근은 공주의 장례식을 위해 양자로 들였고, 공주 이외에 정실부인을 두지는 않았다.
종실(宗室)의 일원으로 외교 등에서 활약
순조의 맏사위인 김현근은 종실(宗室)의 일원으로 국가적인 행사에 많이 참여했다. 그는 헌종 대에 조선의 사절단을 이끌고 두 차례나 북경을 다녀왔다. 조선 정부는 매년 북경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국왕의 아우나 사위와 같은 왕실 인척이 대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정부가 청과의 외교를 중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837년(헌종 3)에 김현근은 헌종이 국왕이 된 것을 확인받는 외교를 펼쳤고, 이를 성사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또한 그는 철종이 사망했을 때 철종의 명정을 쓰고 왕릉에서의 제사를 주관했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는 영건도감의 제조로 활동했다. 고종 대에 그는 판돈녕부사, 판의금부사와 같은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고종은 효명세자의 왕비인 조대비에 의해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어 국왕 위에 올랐으므로, 김현근은 고종에게 고모부가 되는 존재였다.1868년 김현근이 사망하자, 고종은 그에게 영의정 벼슬을 내리고 깍듯이 예우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 김현근의 자손에 대한 예우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김현근 부부를 합장한 묘소는 양주 종암(현 서라벌중고등학교 뒷산)에 조성되었지만, 일제시기에 망우리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김현근의 묘표(墓表)는 1892년에 한장석이 작성했다. 이 해는 명온 공주가 사망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였고, 한장석은 공주의 묘표를 작성한 홍석주의 외손자라는 인연이 있었다.
김현근 부부가 살았던 신혼집은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태화빌딩 앞에 있었다. 이곳에는 현재 ‘죽도궁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죽도궁(竹刀宮)이란 이름이 김현근의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이 대나무칼춤을 춘 데서 유래했다고 써 놓았다. 명온 공주에 대한 순조와 효명세자의 각별한 사랑, 김현근이 종실의 일원으로 보인 다양한 활동상들을 고려할 때, 표지석의 내용은 너무 자극적이고 부실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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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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