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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렵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하기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체로 전해지는 말에, “관(棺)의 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평가가 정해진다”라고
하여 죽은 뒤라야 그 사람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 당대의 학자들이 다산의 저서를 읽어보면서 생전에 벌써 대단한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석천(石泉) 신작(申綽),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등 순조(純祖)시대의 석학들이 다산과 교유하면서 다산의
저서를 접하자 깜짝 놀라면서 크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름난 학자들에 비교해서는 덜 알려진 학자에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 1786-1841)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집안이 너무나 융성하자 어머니의 만류로 과거에 응하지 않아 큰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평강(平康)현령을 지내서 ‘홍평강’으로 알려졌지만 바로 연천 홍석주의 아우이자 정조의 사위이던 홍현주(洪顯周)의 손위 형이기도 했던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다산 만년에 홍현주와 어울리면서 형인 홍석주와도 학문 토론을 계속했지만 홍길주와도 만나고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노론(老論)의 대갓집으로 다산과는 당론도 달랐으나 학문이 서로 통하여 정말로 가깝게 지냈던 아름다운 사귐이었습니다.
다산이 1836년 음력 2월 22일 세상을 뜨자 서울에 소식이 알려지자 홍길주가 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열수(烈水 : 다산)가
죽었다니 수만 권의 서고가 무너졌도다” (冽水死 數萬券書庫頹矣 : 『지수념필(智水拈 )』)라고 탄식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평가입니다. 사람이 죽어서야 제대로 평가를 받는다는 정확한 증거입니다. 다산의 머리에는 수만 권의 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서고에 비교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평가입니까.
인간 서고는 무너졌으나 책은 살아있습니다. 제대로 번역하고
해석해서 오늘의 지혜로 삼아야 할 일은 우리 후인들의 몫이 아닐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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