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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작성한 한글본 윤음
김 문 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조는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국왕이었다. 처음에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민원을 듣고 해결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듣고 처리할 수 있는 민원이란 그 숫자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정조는 선대 국왕들의 왕릉을 방문하는 길에 백성들이 올리는 민원을 접수해 두었다가, 행사가 끝난 후 접수된 민원들을 한꺼번에 살펴보고 처리하는 방안을 사용했다. 정조는 왕릉을 방문할 때마다 계속해서 민원을 접수했기 때문에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이에 대한 백성들의 호응도도 높았다.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그러나 이 방안은 왕릉이 위치한 경기도 일대에서만 실시되었기 때문에 지방에까지 혜택이 골고루 미치지는 못했다. 물론 지 방에 거주하는 백성들 중에는 국왕의 행차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지런히 경기도로 올라와 민원을 접수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방의 백성들이 국왕의 행차 일정을 맞추어 민원을 접수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조는 지방의 백성들을 위해 암행어사를 적극 활용했다. 정조는 지방에서 자연 재해가 일어나거나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의 생활 실상을 감찰하게 했고, 문제가 심각하면 고위 관리들을 소집하여 처리 방안을 의논했다. 정조가 파견한 암행어사에는 규장각의 초계문신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정조가 의욕적으로 육성한 친위세력이었기에 국왕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조가 한글본 윤음을 작성한 것도 지방 백성들을 위한 방안이었다. 여기서 ‘윤음(綸音)’이란 국왕이 관리나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계의 글을 말하는데, 순한문으로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가령 국왕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탕감하는 경제적 혜택을 주려고 하면, 국왕은 그런 취지를 담은 윤음을 한문으로 작성하고 이를 책자로 인쇄하여 지방에 있는 관찰사와 수령들에게 내려 보낸다. 그러면 관찰사와 수령은 그 윤음을 읽고 국왕이 이런 조치를 내릴 것이라는 취지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정조는 왕위에 있는 동안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민원을 해결해 주겠다는 의지를 담은 윤음을 여러 차례 반포했다. 그런데 정조는 한문본 윤음을 작성한 이후 이를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을 첨부하여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기왕의 관례대로 한다면 국왕의 윤음은 관찰사와 수령을 통해 백성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되겠지만, 한글본 윤음이 있으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라도 이를 읽고 국왕의 의지를 빨리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때문이었다. 정조는 윤음 책자의 배포수를 크게 늘리는 방안도 사용했다. 중앙에서 활자로 인쇄한 윤음 책자를 지방의 감영으로 내려 보내면, 지방 감영에서는 이를 그대로 목판에 새긴 다음 다량의 책자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번각본(飜刻本)’ 제작법을 활용한 것이다.
한글본 윤음, 백성과의 직접 소통을 위한 것 정조가 반포한 윤음 가운데 한글본이 첨부된 경우는 26종에 이른다. 그 중에는 왕실의 경사나 반역 사건과 같이 국가의 특별한 일을 알리는 윤음이 있고, 노인을 봉양하거나 농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윤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윤음들은 흉년이 든 지방의 백성들에게 구휼 곡식을 제공하거나 특별히 조세를 경감하는 조치를 내렸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정조는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러이러한 조치들을 취했음을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알리기 위해 한글본 윤음을 작성해 보냈던 것이다.
당시 지방의 백성들이 정조가 보낸 한글본 윤음을 보았는지, 그들이 한글본 윤음을 보고 나서 국왕이 자신들을 위해 내린 조치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정조가 작성한 한글본 윤음을 보면, 그가 관찰사나 수령과 같은 중간 관리자를 거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직접 자신의 조치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은 분명하다.
정조가 작성한 한글본 윤음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고심하던 국왕 정조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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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