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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이었던가. 내가 정부에 몸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대학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던 작가 김승옥(金承鈺)이 찾아왔다. 그때 막 북한을 탈출, 아내 최은희와 함께 먼 길을 돌아 귀국한 신상옥(申相玉)감독의 김정일에 대한 평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신감독에 의하면 김정일은 결코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낮에는 자거나 쉬고 밤에 활동하며,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돌출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거실에 전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수만매의 영화필름을 빼곡하게 꼽아놓고, 그 가운데 그가 즐겨보는 것은 비행기 공중납치, 잠수함으로 상대편의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는 엽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뒤돌아서서 뒤통수치는 장면 같은 것을 특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핵실험 기어이 결행,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신감독의 견해에 의하면, 남북간의 대치상황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일은, 남북 민족 간의 대결이라는 측면보다는 비정상적인 한사람과 정상적인 7천만 한민족과의 대치라는,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훨씬 지나, 지금 이 나라는 온통 북핵문제로 영일이 없다. 추석연휴 때 까지만 해도 설마 북한이 핵실험까지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정작 핵실험사실이 알려지자 나라 안은 물론 온 세계가 충격과 격앙에 빠져있다.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고견을 구하고, 여야대표를 불러 대책을 경청하는 등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진영 간에는 책임공방이 벌어지고, 여야 간에는 햇볕정책, 포용정책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김정일의 정신상태가 정상적인가 아닌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6.15 남북정상회담 직후 김정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건전한 사고를 한다고 세계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북한의 핵실험은 90년대 초 남북 간에 이루어졌던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비롯해, 이제까지의 모든 합의와 선언을 휴지로 되돌렸다. 6.15선언도 사실상 백지화된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문제도 그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역대정권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에게 보기 좋게 배신당한 것이다. 북한에서 실험한 핵의 크기와 그 기술수준이 별 것 아니기를 바라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당국자의 태도는 차라리 연민마저 갖게 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바보처럼 순진했던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김대중 전대통령은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고 호언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이 자위를 위해서 핵을 갖는 것은 이해해줘야 한다는, 일견 어른스러워 보이는 말까지 했다. 1년여 전에는 통일원 장관이라는 사람이 김정일을 만난 것이 마치 큰일이라도 해낸 것인 양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 모든 말과 행동이 이제 북한핵실험으로 모두 머쓱해졌다.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 7개월 동안 경수로 건설비용을 빼고 정부차원에서 4조 5천 8백억 원의 대북지원이 이루어졌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갖다 바친 돈까지 합치면 그 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된다. 그 돈 가운데 상당액은 북한핵개발과 실험에 사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들이 핵실험을 결행하는데 한국이나, 한국의 대북지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북한에 지성을 다한 대가로 돌아온 것이 있다면, 김대중 전대통령이 연연해하던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한민족 생존전략 다시 점검해 보아야 그러나 이제까지는 설사 그럴 수밖엔 없었다고 치더라도 더 이상 김정일에게 끌려가지도 미련을 가지지도 말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4대강국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핵무기로 우리를 방어할 수 있다는 망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우리 한민족이 살아남아서 인류의 진보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원점에서 한반도와 한민족의 생존전략이나 그 철학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북관계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정정당당한 대도(大道)요 정도(正道)여야 한다. 북한주민을 도우러 북한에 들어가면서 입북료를 내는 따위 비굴한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서 돈을 주면서 절까지 하는 궁색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인류보편의 가치와 원칙에 따라 북한의 인권문제 등 말할 것은 말해야 하고, 촉구할 것은 촉구해야 한다. 당당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 인도적인 지원 등 할 일은 하자. 그러나 할 말은 하고 저들이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채찍을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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