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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정시대를 문예부흥기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서양의 문예부흥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라 해도, 어떤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럴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에 엄연히 존재한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반인류적인 서얼 차별제에 대한 반성이 대두되어 영조나 정조는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다산은 「서얼론」·「인재책」등 명쾌한 논문을 통하여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차별하는 반인류적 신분제에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면서 그런 신분사회의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우선 문화와 문명의 선진국가로 그렇게도 조선 사람들이 선호했던 송(宋)이나 명(明)나라에는 그런 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저자로, 성리학 발전에 혁혁한 공이 있고 송나라 6현(六賢)으로 대접받은 소강절(邵康節)을 거론하면서, 신분차별로 그의 학문이 인정받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냐면서 서얼제의 폐지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영조가 이조(吏曹)에 명하여 ‘서얼통청(庶孼通淸)’이라는 진보적 제도를 수립하게 했다고 극구 찬양합니다. 서얼출신으로 성대중(成大中) 등 10명의 문예(文藝)에 뛰어난 사람을 청직(淸職)에 오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을 이어서 정조는 규장각에 4검서로 서얼출신을 등용했음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성대중, 그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당대의 석학으로 얼마나 훌륭한 저서를 남긴 부자(父子)입니까. 요즘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라는 방대한 책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되었고, 출판사 ‘열린터’에서는 그 방대한 책에서 간추려 읽기 편하게 편집한 『궁궐 밖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분의 벽을 넘어 규장각 교리(校理)에 오른 성대중은 조선 선비들의 풍속사를 정말로 맛깔나게 기술했습니다. 음전하고 근엄한 선비들의 뒷골목에는 그런 해학과 위트가 있었고 기지와 지혜, 폭소와 패설이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요즘 경제도 어렵고 정치는 더 답답한 터에 우리의 전통적인 옛 풍속사가 연이어 간행되고 있으니 불행 중에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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