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나의 20세기 생활문화사 서설

문근영 2010. 7. 21. 07:38

492

 

나의 20세기 생활문화사 서설

                                                            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20세기 후반부는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문화적 변동이 일어난 시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도 아니고 문화인류학자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가 태어나 살아온 삶의 자취들을 되짚어보면 부분부분은 미세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혁명적인 생활방식의 변화를 겪어온 것 같다.

우선 거주지만 하더라도 나는 산골 강변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까지 촌놈으로 자라다가 아버지의 이농(離農)에 따라 대전으로 이사했고, 대학에 들어간 이후 약 15년을 서울시민으로 살았으나 직장이 바뀜에 따라 부산을 거쳐 대구에서 생애의 후반부를 보내고 있다. 자식 보러 가끔 미국에도 가고 때때로 외국 관광여행도 다니고 있는데,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의 보통사람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가 사방 백리 안팎이었다니, 우리 앞의 세대는 꿈도 꾸지 못한 유목민(遊牧民)적 생활방식이라고 할 만하다.

                     문화사적 전환기의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그동안에 고향 마을은 댐으로 수몰되고 선산의 산소들은 납골묘로 바뀌었다. 그러니 우리 집안은 종교에 관계없이 무조건 화장이다. 시제는 없어지고 대신 추석날 납골묘에서 차례를 지낸다. 종손인 장조카는 외국에 살고 있으니 기제사도 형님이 돌아가시면 더 이상 모시기가 힘들 것 같다.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던 유교적 장례? 제사 풍속이 불과 한 세대만에 이렇게 바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거공간, 즉 집도 많이 바꾸었다. 생애 초기의 10여년은 초가집에 살다가 청소년 시절의 10년은 기와집이나 함석집 같은 ‘단독주택’(이 말을 쓰려니 갑자기 낯선 느낌이 든다. 그냥 ‘집’이었던 것이 언제부터 관청용어나 군대용어 비슷한 ‘단독주택’으로 바뀌었을까?)에서 살았고, 그후 40년 이상은 건설회사 이름이 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나도 아파트 세대임이 분명하다.

경제적으로 따져보면, 서울에서 하숙집, 자취방을 전전하다가 결혼 후 숱한 전세방을 거쳐 드디어 내 소유의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하고, 그후 조금씩 넓은 아파트로 옮겨온 셈인데, 중간에 서울서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는 바람에 다시 서울로 진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부분적으로는 중산층의 착실한 삶을 살았으나, 크게 보면 재테크에 무능하여 중산층에서 탈락한 소시민으로 분류됨 직하다. 아마 전국민의 90% 이상이 생활환경조사서에는 ‘중’으로 적겠지만, 그 내용상의 편차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덕정비’가 선정비이다. 지금도 지방에 가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등이 새겨진 크고 작은 선정비를 길가에서 수없이 볼 수 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전임 사또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지난 달 서울의 동작문화원 앞에 세워진 전임 동작구청장의 공덕비가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이런 유쾌하지 못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정비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명종 때 합천군수를 지낸 이증영(李增榮)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고을 사람 주이(周怡)가 다음과 같은 송별시를 지었다고 한다. 주이는 주세붕(周世鵬)의 증손자이다.

한국인은 골프를 치는 사람과 치지 않는 (또는 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는데,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 쪽에 속한다. 군대는 갖다 오고 외국유학은 못한 탓인지 크게 출세는 못했고, 서울서 대학을 다녔지만 결국 고향 여자와 결혼했으니,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비약이 없는 평범하고 밋밋한 삶이다. 남 앞에 내세울 장기도 없다. 노래나 춤, 바둑, 고스톱, 스포츠, 어느 것 하나 신통한 것이 없고, 그저 천천히 오래 걷는 것은 웬만큼 자신이 있다. 이걸 요즘은 트레킹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사람과 세상을 간단하게 재단할 순 없지만

음식은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 잡식성이다. 김치와 된장국을 비롯한 가정식 백반을 선호하지만, 자장면, 라면, 보신탕 같은 별식도 마다하지 않는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노래나 음악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 여자가수는 송민도, 백설희, 양희은을 좋아하지만, 국악 쪽에선 김용우나 김명자 같은 젊은 소리꾼들이 좋다. 밥 딜런, 비틀즈도 존경하지만 신중현, 김민기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피셔 디스카우의 독일가곡을 카세트 테이프로 듣는 맛도 기가 막히고, 관현악으로 편곡한 「님을 위한 행진곡」은 소름을 돋게 만든다. 이른바 ‘강남좌파’ 비슷한 ‘크라잉 넛’이나 반지하 자취방의 대학생 같은 장기하도 들을 만하다.

사람과 세상은 얼마나 복잡다양한가.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을 어떤 잣대와 기준으로 재단하고 분류하는 순간, 그것은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몇 개의 개념으로 (가령 진보, 보수 등으로) 고착되지만, 정작 삶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은 무시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20세기 후반부를 살아온 나 같은 세대는 자기도 모르게 문화사적 전환기의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농경문화에서 도시산업문화, 또는 아파트문화로 이주한 첫 세대로 기록될 것 같다.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