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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녀 간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만남도 많았지만, 더욱 가치 있고 생산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의 뜨거운 학문논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7년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대한 철학적 논쟁으로 만났던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유명한 만남을 비롯하여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와의 우정과 학문논쟁의 긴긴 만남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만남이 많았습니다.
18년이라는 어려운 유배생활 동안에도 다산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우정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유배초기에 10세 연하의 혜장선사와의 만남도 시가 있고 학문이 있던 만남이었지만, 혜장이 40세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5~6년의 짧은 만남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혜장의 빈자리를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혜장의 사후 4년째인 1814년 53세의 다산에게 10년 연하의 43세의 학자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 1772-1839)가 「다산초당」을 방문해 매우 뜻 깊은 만남이 이뤄집니다.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시호가 무숙공(武肅公)인 이주국(李柱國)의 증손자로 일찍이 진사과에 급제하여 학자로서 이름이 높던 노론계열의 학자가 남인계열의 유배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침 아들이 강진의 이웃고을인 영암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 와서 생활하던 문산 이재의는 다산의 명성을 듣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싶어서 1814년 3월 4일 다산초당을 찾았습니다.
노론계열의 권세 있는 학자가 남인계열의 죄인 다산을 찾은 것도 유별하고 이후 3년이 넘도록 인성론(人性論)에 대해 서간을 통한 학문논쟁을 계속했던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1818년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서울에 살던 이재의는 두릉(斗陵)으로 다산을 찾으면서 우정과 학문토론의 만남을 계속했습니다. 1836년 다산은 세상을 떠났고 1838년에 다산의 부인 홍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 집안간의 내왕이 있었으니 그들의 만남은 그때까지 계속된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박석무 드림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목록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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