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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한기의 기학(氣學), 그 가능성과 한계는? / 임부연

문근영 2010. 7. 3. 06:56

제50호 (2007.6.27)


최한기의 기학(氣學), 그 가능성과 한계는?


임 부 연(서울대 종교학과)


조선 문명의 불꽃이 꺼져가던 시대를 산 혜강 최한기, 그는 독서와 저술의 세계인이었다. 그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구 문명의 각종 학문과 지식을 섭취하고자 자신의 모든 경제력과 열정을 바친다. 가령 최한기는 당시 베이징[北京]에서 나온 신간 서적이 서울에 들어오면 모두 열람할 정도로 엄청난 독서열의 소유자였다. 혜강은 독서를 통해 기존의 조선사회에 안주하지 않고 서적과 상품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준비했다. 그 결과, 최한기는 근대적인 지구촌 의식을 가지고 미래의 쓰임을 기다리는 진정한 학문, 곧 기학(氣學)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몸은 비주류였지만 마음만은 미래의 주류임을 자부한 최한기의 학문은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일까?


외부세계와 부단히 소통하고 확장되는 실천적 주체


최한기는 기(氣)의 관점에서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을 ‘기학(氣學)’이라 불렀다. 그의 기학은 전통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유기체적인 사유와 함께 서양 근대의 자연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혜강은 하나의 가문, 지역,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학문으로서 기학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혜강의 학문이 갖는 독특성은 무엇보다 경학(經學)의 탈피와 고유한 언어에 있다. 최한기는 유교의 경전이나 성인(聖人)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의미 체계를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래서 창조적인 학문 정신을 가진 그는 “성인을 배우는 것보다 운화(運化), 곧 기의 운행과 변화를 배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자신의 기학을 구축한 최한기는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交接]를 중시하였다. 혜강은 윤리적 도리가 선험적인 본성으로 내재한다고 보는 성리학을 유아론적[主我]이라고 비판한다. 성리학처럼 선험적인 본성을 우주적인 본질로 전제하면 내성적인 경향에 빠지기 때문이다. 기의 운행과 변화를 중시하는 최한기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운화, 곧 교접운화를 통해 윤리적인 가치판단을 규정한다. 그는 단정한다. “교접운화로 말미암아 선악(善惡)과 허실(虛實)의 이름이 발생한다”고. 사람의 윤리적 가치나 실천적 역량은 자기 외부와 맺는 관계 속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최한기는 외부 세계와 무한히 소통하고 확장되는 실천적인 주체를 구상하였다.

 

문명간 대화 불가피, 좋은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자


제국주의 열강이 지배하던 국제질서 속에서 최한기는 문명 간의 상호 교류와 대화가 불가피한 대세라고 판단하였다. 혜강은 유교문명에 안주하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나 서구문명에 경도된 개화론(開化論)과 달리 동서취사론(東西取捨論)을 전개한다. 동서취사론은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가 하는 기준에 따라 더 좋은 것은 취하고 버릴만한 것은 버리자는 견해다. 이런 관점에서 최한기는 서양의 법제나 기계류 등 실용에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그는 무형(無形)의 유일신을 내세우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등은 외도(外道)로 규정하여 배척한다. 그런데 이러한 배척은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윤리에 어긋난다.


윤리와 관련해서 우리는 최한기가 구성한 세 가지 운화의 상호관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운화는 개체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신운화(一身運化), 사회적·정치적인 차원의 통민운화(統民運化), 우주적인 차원의 천지운화(天地運化)로 구분된다. 여기서 일신운화는 통민운화를, 통민운화는 천지운화를 받들어 따라야 한다[承順]. 혜강에게 우주적인 차원의 천지운화는 개체가 사회로 확장되고 사회가 우주로 확장되는 과정에 궁극적인 기준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자연의 천지운화를 따르면 선이 되고 어기면 악이 된다. 더구나 그는 사람을 평가할 때 선천적인 기질의 조건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을 자연에, 윤리를 물리에 환원시키는 듯한 혜강의 시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글쓴이 / 임부연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 공저:『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대화 : 연평답문』, 이학사, 2006

· 저서:『중국철학 이야기3:근·현대-유학의 변혁,서양과의 만남』,책세상, 2006

        『정약용&최한기 : 실학에 길을 묻다』, 김영사, 2007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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