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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포럼] 한국고전번역원의 개원에 부쳐 / 심경호

문근영 2010. 5. 17. 18:49

한국고전번역원의 개원에 부쳐


‘한국고전번역원’이 전통인문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고전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규범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원전들을 번역하고 가공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개원하였다. 이즈음 지식기반사회에서 인문학이 지니는 가치를 재확인해야 한다는 학계 및 사회의 요구가 높아져 있는 터라서, 고전번역원의 개원은 시의적으로 매우 적절하다. 그런데 고전번역원은 학계에 문헌 자료나 전산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의 정책적 비전을 실행해 나가는 공적 책무를 지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고전 번역기관이 성립한 것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도 매우 이례적이다. 대만의 국립편역관(國立編譯館)과 북한의 60년대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지만, 일본과 중국의 경우에는 그러한 공적 기관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고전번역원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끊임없이 검증받아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전번역원에 대해 몇 가지 요청을 하고자 한다.

첫째, 번역 인력 교육의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여야 한다.

고전 자료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문 자료의 번역 인력을 보면, 전통 한학을 수학한 분들의 비율이 낮아지고 한국학 전공의 학사 및 대학원 학위 소지자들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한문고전 번역자들이 통합적 인문지식과 가치지향을 갖출 수 있도록 새로운 번역교육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현대를 흔히 문화자본의 시대라고 하는데, 고전번역원은 이 문화자본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여 고전 자료를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방법에 따라 가공하여 현재적, 미래적 주제를 추출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려면 고전번역원은 종래의 교육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지식의 통합 및 텍스트의 변용 방법과 관련하여 위탁 교육의 방식을 원용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고전 자료의 번역 및 가공 방법, 가공의 대상 등 구체적인 사업과 관련하여 학문적 합의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고전 자료들을 현대적으로 변용하기 위해서는 문헌 자료들을 1차 가공(목록화, 표점, 색인, 기초자료의 전산화 등)하거나 2차 가공(주석과 번역)하는 일을 선행하거나 적어도 병행하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전번역원은 조선시대에 문헌 자료들을 정리한 경험과 방법을 참조할 뿐만 아니라, 근세의 일본과 중국이 한문 자료의 정리와 현대적 가공에서 쌓아온 경험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문 고전을 가공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곧, 원전의 교감, 주석의 집성, 언해(곧 현대의 번역), 의미의 재해석 등을 몇 시대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간행한 많은 서적들이 한자문화권에서 산출된 고전 텍스트들 가운데서도 학문적 가치가 높다고 세계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일본은 초(抄)와 훈독(訓讀)을 통해 중국고전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자국의 고전을 각 시대에 맞게 변형하여 왔다. 17세기 말 오규 소라이(荻生 徠)는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하고 언어표현에 중시할 것을 도그마로 내세워 번역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근세에 들어와 일본은 각종 문헌자료의 정리, 목록 작업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1909년부터 후산보오(富山房)의 『한문대계(漢文大系)』와 와세다대학출판부(早 田大學出版部)의 『한적국자해전서(漢籍國字解全書): 선철유저(先哲遺著)』는 고주(古注), 신주(新註), 그리고 자국의 역주 업적을 종합하는 방법을 확립하였다. 이후, 각 연구자나 연구단체가 과학연구기금 등의 지원을 받아 해당 분야의 고전을 전문적으로 번역할 뿐만 아니라, 굴지의 출판사가 자국의 고전과 중국의 문사철(文史哲) 고전을 선별하여 역주해오고 있다.

중국의 경우는 청대 건가학파가 교감(校勘)·집일(輯佚)·변위(辨 )의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대만의 국립편역관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고적 정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중국의 경우, 1958년 국무원고적정리출판규획소조(國務院古籍整理出版規劃小組)(줄여서 ‘古籍小組’)는 전국적 규모의 고적정리 계획과 출판을 지도하였으며, 1962년, 1982년, 1992년에는 전국 규모의 고적정리출판규획회의(古籍整理出版規劃會議)가 개최되었다. 이에 따라 북경대학 등 각 대학만이 아니라, 중화서국(中華書局),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등 주요 출판사들이 고전의 표점본과 교주본을 속속 출간해오고 왔다. 또한 1984년부터는 귀주인민출판사(貴州人民出版社)가 문사철의 각 고전들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중국역대명저전역총서(中國歷代名著全譯叢書)’를 간행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한문 자료의 번역에 앞서, 목록 작업과 표점 작업, 교감 작업을 발달시켰으며, 자국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여 왔다. 고전번역원도 목록, 표점, 교감 등의 1차 작업을 충실히 행하면서 그 기초 작업을 바탕으로 계획성 있게 고전 자료를 번역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번역의 기초 자료, 번역 과정에서 생성된 각종 자료, 번역의 결과물을 전산화하여야 한다.

현대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자료의 전산화를 통해서 지식의 공유 폭을 넓혀나가는 추세이다. 종전에는 전근대시기의 전적을 정리하면서 전산화를 고려하지 않고 2차 가공에서 번역과 색인에 머문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고전의 정리와 역주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은 전산화를 2차 가공으로서 고려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2004년 8월 북경에서 개최된 ‘제3차 한문사자료고연토회(漢文史資料庫硏討會)’에서 중국 고적정리출판의 발전방향은 전산화에 있다고 확인하였다. 일본도 한적 목록의 데이터베이스를 추진하는 등, 고전 자료의 정리 작업 결과를 전산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는 이미 문집총간 텍스트와 국학기본 사료를 전산화해서 인터넷상에 제공하여 왔다. 고전번역원은 민족문화추진회의의 경험과 방법을 계승하여, 앞으로 전산화 사업을 확대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자료 검색의 편의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색인용어 시소러스 개발과 같은 사업을 추진하는 등, 학술적이고도 기술적인 연구를 병행시켜야 할 것이다.

넷째, 개인, 민간출판사, 외부 학술단체의 번역 및 가공 사업과 연계를 맺어야 한다.

고전번역원은 고전 자료의 가공, 번역, 전산화와 관련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겠으나, 전근대시기의 모든 자료들을 규범에 맞게 번역하고 가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개인, 연구모임, 연구단체, 출판사 등을 지원하거나 사후에 승인하여 그 번역 및 가공물을 고전번역원의 규범적 번역으로 수용하는 방안도 고려하여야 한다.

최근에는 역사사실과 고전 자료들을 현대적 텍스트로 변용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문화콘텐츠 사업에 연계시키는 작업이 활발해졌다. 실상 고전 자료는 학술적인 규범에 따라 번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삼아 의역할 필요도 있다. ‘학술번역’은 원문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자료의 기초적 가공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한 주석을 곁들여 두어야 한다. 하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의역’이라든가 ‘문화콘텐츠 사업과의 연계를 예상한 자료가공’은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의역은 가능한 한 원문의 뜻을 번역자 스스로의 사상과 심리로 재해석해서, 그 오묘한 뜻을 현대의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하여야 한다. 고전번역원은 기관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의역까지 모두 수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전번역원은 기관이 직접 행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번역 사업을 외부의 개인이나 단체가 행할 수 있도록 권장할 필요가 있다.

고전번역원은 고전 자료를 단순히 번역하는 기관으로서 자족해서는 안 된다. 고전 자료를 현재와 미래에 이용할 수 있도록 소통시키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설정하여야 할 것이다. 고전번역원이 교육 인프라의 구축과 자료 가공 방법의 규범화를 통해서 학문적으로 의미 있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고전 번역 및 가공의 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함으로써, 미래의 지식기반사회 구축에 크게 기여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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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