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덩이 호박 앞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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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은 저장성이 있는데다 부기를 빠지게 하는 효능이 있어 가난한 집 산모가 미역 대신 호박국을 끓여 먹거나 이뇨작용을 한다 하여 약용으로도 곧잘 쓰였다. 그러나 누구도 늙은 호박을 귀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늙은 호박이 이른바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옛날에는 고작 구황(救荒)식품이었던 호박죽이 이제는 고급호텔에서조차 없어서는 안 될 인기식품인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끼니로 그것을 먹어야 했던 나로서는 그 호박죽(호박풀떼기라 부름)이 고급음식이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집마다 담장위에 올렸던 호박에 대한 나의 정감은 각별하다. 누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비웃는가. 노랗게 꽃이 핀 호박밭에 벌떼가 날아다니는 그 평화로운 풍정(風情)을 단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맛도 맛이지만 나는 그 풍정이 그리워 해마다 내 밭의 가장자리에 호박을 심는다. 호박에 둘러싸인 내 작은 채소밭은 호박꽃이 피면서 평화의 정원으로 바뀐다. 그리고 호박은 봄·여름·가을 없이 줄기차게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내준다. 호박순과 호박잎은 따도따도 새로 돋는다. 호박줄기가 멀리 달아나지 못하도록 적당한 길이 때 그 순을 따고, 그 순에서 두 번째 호박잎을 딴다. 그래야 호박이 잘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딴 호박잎이 연하다. 나는 호박잎 따는 법을 어머니한테서 배웠다. 살짝 찐 호박잎을 된장에 적셔 밥숟갈에 얹거나, 쌈으로 먹는 것은 분명 여름철의 별미다. 거기다 애호박은 어떻게 그리도 많이 열리는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여름 내내 수도 없이 돌렸다. 손국수나 수제비에 숭덩숭덩 썰어 넣었을 때의 그 구수하고 깊은 촌맛이나, 새우젓 넣고 끓인 호박찌개의 맛은 또 얼마나 개운하고 깔끔한지, 여름 한철 입맛을 돋우기에 넉넉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호박의 진면목은 늙은 호박에 있다. 크고 잘생긴, 하얀 분을 바른 늙은 호박이 널려있는 호박밭의 풍요로움을 본 적이 있는가. 잘 늙은 호박은 확실히 풍요로운 결실의 상징이다. 그러나 크고 잘생긴 늙은 호박을 얻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우선은 씨가 좋아야 하고, 밑거름이 풍부해야 한다. 좋은 씨라야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지만, 거름이 모자라면 호박은 늙다가도 썩는다. 늙는데도 영양이 필요하고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지극한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크고 잘 생긴 그 싹수를 보고 애호박 때 따지 않아야 한다. 잘 생긴 놈일수록 따고 싶은 유혹이 따르지만 애써 참아야 한다. 햇볕을 받아 곱게 잘 자랄 수 있도록 자리도 잡아주어야 한다. 남의 손을 탈세라 매일같이 보살펴야 한다. 이렇게 늙은 호박 하나를 만드는 데도 순풍우조(順風雨調), 하늘의 도움과 땅의 지력(地力), 그리고 사람의 정성 등 이른바 천지인(天地人) 삼재가 합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내 호박처럼, 아주 가끔은 풀섶에 숨어서 저 혼자 늙은 호박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 눈에 띄었더라면 일찌감치 따먹혔을 것을 풀섶에 있어 화를 면한 것이다. 깊은 산속, 비탈에 자란 나무가 대들보가 된다는 노장철학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나 크고 잘생긴 늙은 호박 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잘생긴 늙은 호박 하나를 앞에 두고 나는 생각한다. 호박 하나가 늙기도 이렇게 쉽지 않거늘. 잘 늙어야지. 추하지도 구차하지도 않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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