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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 외국어 회화에 소홀했던 역사 / 배우성

문근영 2010. 5. 17. 19:04

외국어 회화에 소홀했던 역사


배 우 성(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내 연구실이 들어 있는 건물에는 우리 대학 학생들이 외국학생들과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 있다. 어느 날엔 영어로, 다른 날엔 중국어로, 또 다시 어느 날엔 일본어로 대화하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세계화나 국제화의 방향에 대한 논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학생들이 발랄하고 생기 있어 보여서 좋다.


내 경우 외국어는 한국사 연구자가 되기로 생각했던 때부터 서서히 멀어져 갔던 것 같다. 한문의 문리만 트이면 자료를 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문의 문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특별히 명·청과 주고받았던 외교문서를 정확히 독해하기 위해서는 한문뿐만 아니라 청대 공문서, 중국어 회화, 만주어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국사 연구도 결코 외국어의 무풍지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어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이 외국어 회화, 특히 영어에 능통하지 않았던 것이 19세기 말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있었을 그 시절, 조선에  그 정도로 미국 사정과 영어에 밝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개항기의 조선 지식인들 중 대다수는 영어 무능력자였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은 미국에 의해 개항되었던 일본과는 달랐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 지식인들이 같은 시점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덜 느낀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문학적 소양과 회화를 겸비한 실력자도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경우는 어떤가. 조선이 대부분의 지식정보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의 국제어는 아무래도 중국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중국어 실력은? 규장각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에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회화교재들이 남아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역관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필담(筆談)에 능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부분은 중국어 회화에 관한 한 무능력자였다.


어느 저명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동양 전통사회의 지식인들은 과학 전문지식을 경시했으며 중인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 한다. 이 지적은 변명의 여지없이 타당한 것일까? 도대체 18세기를 살았던 조선 지식인들은 왜 중국어 회화에 무심했던 것일까?


한국인들이 중국어 회화를 익힐 때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중국인들이 대화 중에 고사성어를 자주 인용하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대화에서 고전이 인용되면 통역의 어려움은 배가 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중국어 회화에 능통한 문신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들은 대개 임금 앞에서 통역을 하는 어전통사(御前通事) 역을 맡았다. 물론 통역 전문가인 역관이 있었지만, 그들은 생활언어에 능할 뿐 문학적 소양과 재질은 없었다. 반면 파견되어 오는 명나라 사신들은 대체로 문학적 소양이 높은 이들이었다. 문자와 언어에 능숙한 문신, 곧 중국의 고전과 회화에 능숙한 문신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신 어전통사는 선조를 도와 명군 지휘관을 맞는 역할을 수행했다. 심우승(沈友勝)과 이정구(李廷龜)는 중국어 회화를 능숙하게 구사한 대표적인 어전통사들이었다. 심우승은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이 하는 귀엣말을 듣고 그 내용을 선조에게 아뢸 정도였다.


부안 우반동에 살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형원도 유창한 중국어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1667년(현종 8) 복건성에서 출발한 배 한척이 제주도에 표류해 온 일이 있었다. 조선 관리들이 그들을 구해 주며 먹을 것을 건네자 그들이 그 야채의 이름을 물었다. 조선관원들이 조선식 이름으로 답하자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유형원이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유형원이 유창한 회화로 그 야채의 이름을 말해주자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


유형원은 그들을 만나러 갔던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유형원은 남명(南明) 정권의 동향을 알고 싶어 했다. 청이 북경을 장악한 지 이미 20여년이 지났지만, 유형원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유형원은 조선이 청에 대해 복수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매일 밤 거문고를 뜯으며 ‘한음(漢音)으로’ 노래했다.


중국어 회화에 대한 관심의 부침


유형원이 언어를 도구로만 여겼다면 그처럼 ‘한음(漢音)’에 집착했을 리는 없다. 그가 살았던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어 회화는 중화(中華)의 정음(正音)에 가장 가까운 소리로 여겨졌다. 지식인들은 그런 중국어 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오랑캐 나라는 백년을 가지 못할 것’이라며 청의 운명적인 몰락을 점쳤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치세를 거치면서 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제 그 ‘오랑캐 나라’라던 청이 중화의 정음에 가깝다던 그 중국어 회화의 사용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어 회화에 대한 관심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북경에서 파견된 만주족 출신 사신들이 서울로 들어올 때마다, 조선의 관료들은 그들이 ‘오랑캐’로 생각했던 사람들과 마주앉아야 했다. 조선초기와는 달리 사신 접대에 참여했던 신하들을 영예롭게 여기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역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화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이제 관료들이 그들과 직접 말을 섞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중국어 회화를 배우는 일은 이제 수치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북벌론(北伐論)과 존주론(尊周論)이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간 뒤, 북학론(北學論)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중국어 회화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박사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사대부는 중국을 오랑캐로 보아 부끄러이 여기고, 중국어까지도 부끄러워한다. 대저 중국어란 한(漢), 당(唐), 송(宋), 명(明) 이래 중국의 정음(正音)이라, 청나라의 음과는 다르니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단 말인가?” 중화를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북경음(北京音), 즉 중국어 회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북학론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식인들의 중국어 회화에 대한 관심은 크게 살아나지 않았다. 중국 지식인들과의 교류는 오랫동안 해 오던 필담(筆談)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한글·만주어·운서·어휘집 등 어학 분야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외국어 회화에 관한 한 무능력자였지만, 언어에 관한 시대적인 요구를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쓴이 / 배우성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 국토관과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공저), 효형출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