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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역시 빠르기만 합니다. 엊그제 일 같은데 30년이 가까워집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잡히면 죽는다’라는 공포에 휩싸여 저는 망명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해 5월 27일 새벽에 광주가 다시 계엄군에 의하여 장악되자 검거선풍이 불면서 6월 초부터 긴긴 은신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공포요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잡히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어찌해서 안착한 곳이 충청남도 온양온천의 하숙집 방이었습니다. 몸이 아파 휴양 차 온천목욕을 하러 온 작가라고 둘러대고, 친구에게 빌려온 『여유당전서』영인본(경인문화사) 첫째 권인 시문집을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서는 저급의 자전(字典) 한 책이 모두였습니다. 1980년 7월 하순의 찌는 더위도 잊고, 우선 죽음의 공포를 떨치고, 터지려는 머리를 한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도 뭔가에 몰두하지 않고는 배기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부터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원고지도 아닌 대학노트에 그냥 마구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천주학쟁이(지금으로 치면 공산당)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혹독한 국문을 당하고 죄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도 대신(大臣)의 우격다짐으로 18년의 긴긴 유배생활을 했던 파란만장한 다산의 인생을 제 자신의 서러운 망명생활로 빗대어 신이 나게 번역에 매진했습니다. 글은 고사하고 모르는 글자가 너무 많아 옥편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까지 번역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억울하게 귀양살다가 16년째에 세상을 떠난 중형 정약전의 일대기,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을 학자에 올랐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어간 녹암 권철신, 박학다식한 천재 학자 정헌 이가환이 감옥에서 죽어가던 서러운 사연들을 번역하면서, 때로는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면서 고달픔을 모르고 번역만을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책 한권 분량을 마치던 무렵 우연한 일로 은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그때 12월 하순에 검거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고등군사재판이 끝나갈 무렵이라 잡혀서 군영창에 갇히고 보니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군영창에서 일반 교도소로 옮긴 것은 81년 1월에 계엄이 해제된 뒤의 일이었습니다. 징역을 살다가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때가 82년 3월이었습니다. 나오자마자 다시 마치지 못한 다산의「묘지명」이라는 글들을 번역했습니다.
83년에 책으로 출간할 수 있는 번역 원고를 ‘창작과 비평사’라는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오랜 교정과 교열을 하느라 『다산산문선(茶山散文選)』이라는 ‘창비신서70’으로 간행된 것은 85년 12월이었습니다. 미숙하기 이를 데 없으나 뒷날 수정가필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책은 나왔지만, 수정가필할 겨를을 갖지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감옥가기 전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번역서와 『다산산문선』이라는 번역서는 어쨌든 제가 처음으로 다산 저서의 그 부분을 번역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더 수정가필이 필요하지만, 그런 책을 번역했다는 이유가 합쳐져서 새로 탄생된 한국고전번역원의 책임까지 맡게 되고 보니 그런 죽음의 시절에 번역에 매달려 악전고투하던 생각이 떠올라 회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번역된 책이었으나, 그래도 다산연구가들로서는 그 책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번역의 중요함은 그런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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