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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 고전 독법(讀法), 시공(時空)에 따라 달라 / 배우성

문근영 2010. 4. 23. 10:29

고전 독법(讀法), 시공(時空)에 따라 달라


                                                       배우성(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대략 이런 뜻이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아무도 읽지 않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다. 동양학을 공부하는 학자라면 모를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이 논어를 읽을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이 글귀가 아주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학교교육 덕분이다. 공교육에 관한 논란이 많지만 어느 누가 이런 종류의 미덕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은 공자의 시대와 다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더더욱 공자가 살던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도 ‘먼 곳에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지 않을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즐거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즐거움이다.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아!”


그런데 만일 논어를 역사적으로 읽어 보면 어떨까. 논어가 춘추시대 공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니 그 안에는 당연히 춘추시대의 역사가 배어 있다. 벗, 멀리서 온다는 것, 즐거움에 관한 정의(定義,definition)는 모두 춘추시대라는 역사적 맥락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논어라는 책의 본문이 확정된 것은 한나라 때였다. 따라서 그 논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나라 때의 상황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논어가 언제 한반도에 전래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아마도 한자의 전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을 것이다. 뒷날 통일신라는 태학감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에서는 논어가 필수과목 중 하나로 교육되었다. 이 책이 한국사에 좀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시대였다. 논어는 잘 알려진 대로 맹자·중용·대학과 함께 사서(四書)를 이룬다. 이 책들을 사서로 묶어 체계화한 것은 남송대의 사상가 주자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주자의 주석이 붙어 있는 책을 통해 공자와 만났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읽은 것은 주자가 친절하게 안내한 공자의 말이었다.


다시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글귀를 어떻게 읽었을까. 물론 조선시대의 한자발음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테니 약간의 음가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의 음을 따라 읽는다는 기본 원칙은 유지되었을 것이다. 한문에 토를 달아서 읽으면 훨씬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지금도 논어의 이 구절을 이렇게 읽는다.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아!” 그런데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유붕이 …하니’라는 독법(讀法), 한문식 어법에 우리식 토를


오늘날 중국어와 우리말의 언어구조와 같지 않듯이 한문과 옛 우리말의 구조가 같았을 리 없다. 우리 역사에는 우리말과 한문 사이의 언어구조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이두나 향찰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한자나 한문을 우리말의 구조 속에 녹여 내려는 시도들이었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아”처럼 한문에 토를 다는 것은 어떤가. 물론 나는 국어학에는 문외한이다. 다만 내 느낌으로는 ‘유붕(有朋)이’라고 토를 붙여 읽는 순간, 이 말은 구조적으로는 우리말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이 말을 해석하면 ‘벗이 있어’가 된다. 그런데 ‘이’라는 토는 ‘붕(朋)’이라는 명사에는 어울리지만, 붕(朋)은 이미 ‘유(有)’에 속한 말이기 때문에 ‘이’라는 토를 받아들이기 불편하게 된다.


가장 한국어적인 방식, 즉 ‘벗이 있어’ 식으로 읽기 위해서는 ‘붕(朋)이 유(有)하여’처럼 되어야 하지만, 그러려면 붕(朋)과 유(有)의 위치가 뒤바뀐다. 그렇다고 ‘유(有)하니 붕(朋)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유붕(有朋)이’라고 읽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순간부터 한문의 어순과 문법구조가 그대로 우리 언어·문자생활에 정착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정착된 한문은 고급문화와 권력을 상징한다. 우리말의 구조와 일치되지 않는 한문을 그 맥락과 문법구조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여우펑(有朋)’, ‘유붕(有朋)이’ 또는 ‘토모 아리(=벗 있어)’


중국인들이 “유붕 자원방래(有朋 自遠方來)”라는 구절을 보면 어떻게 읽을까. 당연히 ‘여우펑 쯔위엔팡라이’라고 읽을 것이다. 명청시대 중국 지식인들도 이와 비슷하게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읽었을까. 조선이나 명청의 지식인들처럼 음으로 읽는다면 ‘우호-오(有朋)’처럼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리학자나 고학자를 막론하고 에도시대의 사상가들은 ‘유붕’을 ‘우호-오’가 아니라 ‘토모 아리’라고 읽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벗 있어’ 쯤에 해당되는 말이다. 일본은 중국의 고전을 일찍부터 훈으로 읽었다. 그들은 중국의 고전을 해석하고 이해했지만, 한문의 문장구조 그대로 읽지는 않았던 것이다.


에도시대 고학파를 대표하는 오규 소라이는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도교와 불교에 ‘오염’된 사서(四書)보다는 고대의 육경(六經)을 중시했다. 소라이는 육경의 의미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육경이 생산되었던 시대의 언어, 즉 고대 중국어의 원래 발음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론 차이와 번역의 의미를 자각하면서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상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오규 소라이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으며, 공(公)과 사(私)를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영역의 차이로 이해했다. 소라이로 인해 주자와 사서(四書)는 에도시대 일본사상계에서 그 권위를 손상당했다. 조선에도 박세당처럼 주자의 주석에 반기를 들거나 허목처럼 육경을 중시한 학자들이 있었다. 정약용도 오규 소라이의 학문적인 성과들을 참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고전을 한문의 문법구조에 토를 달면서 읽었다는 점에서, 원래 모습을 강조한 오규 소라이와는 달랐다.


유학의 고전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분명 공통의 지적 토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고전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들 자신이 내부자이기 때문에 ‘여우펑’이라고 읽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언어적 환경 차이로 인해 ‘토모 아리’로 읽어왔다. 조선은 내부자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자국의 언어적 관습을 덧붙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여우펑’과 ‘토모 아리’, 그리고 ‘유붕이’의 차이는 세 나라의 문화적 차이, 나아가 문화 해석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글쓴이 / 배우성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 국토관과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공저), 효형출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