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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꾸짖습니다. “제자들아,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라고 시 배우기를 권장합니다. 『논어』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는 흥을 돋우어주기도 하고, 관찰할 수 있게도 해주며, 뭇 사람과 화락하게 지내게도 해주며, 원망할 수도 있게 해주며, 아버지와 임금도 섬길 수 있게 해주며, 새나 짐승, 초목의 이름까지를 많이 알게 해준다”(小子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事父事君 多識鳥獸草木之名)
그렇습니다. 시를 배우면 얻어지는 효과가 그렇게 크다는 것을 수천 년 전에 공자께서 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시야 일류의 문학이고 나머지는 모두 시의 아래 등급이라고 합니다. 옛날 돌아가신 성래운 교수는 참으로 시의 낭송에 뛰어난 분이었는데, 문학에서 시의 낭송분과는 ‘7류’라고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산의 시 「우래(憂來)」라는 12장의 시를 읽어보면 다산이 살아가던 시대를 관찰할 수 있고, 귀양살이에 고달파서 세상을 원망하던 다산의 쓰린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불행에 좌절하지 않던 용기를 읽으며 흥을 돋울 수도 있습니다.
천 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 千夫裏 단정한 선비 하나 의젓하게 있고 보면 端然一士莊 그들 천 명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千夫萬手指 그 한 선비야 미쳤다고 한다네 謂此一夫狂
모두가 동쪽으로 가는데 서쪽만이 옳다고 혼자서 외롭게 서쪽으로 간다면 만인들이 비웃으며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예나 지금이나의 세태, 모두 취해서 곤드레만드레 떠들고 지껄일 때, 온전한 한 선비가 단정히 앉아 있다면 모두가 비웃는 세상이 된다는 다산의 뜻이 의미 깊습니다. 옳고 그름도 구별하지 않고 오로지 맹마청령(盲馬聽鈴)격으로 한쪽으로 쏠린 현상에 기울고 마는 오늘의 세태, 다산의 시를 읽으면 그런 것에 대한 큰 반성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관념적 성리학에 매몰되어 실현성도 없고 해결책도 아닌, 이기(理氣)와 본연기질(本然氣質)을 논란하고 있을 때, 외로운 선비 다산은 다산초당에 홀로 단정히 앉아, 부란(腐爛)한 세상을 구제하려는 깊은 사념에 잠겨 있었으니,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다산의 한숨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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