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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백년, 기쁘고 즐겁던 날보다는 슬프고 처참한 비극의 순간들이 너무나 많은 나라였습니다. 건국 초기부터 왕자의 난이 일어나 살육의 비극이 일어났고, 소년 임금 단종의 유배와 사사(賜死)라는 천고의 비극을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이시애·이괄·홍경래 등의 피비린내 나는 국란도 더 없이 비참했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참혹한 전쟁은 또 얼마나 비참한 외침이었는가요.
그러나 조선 전기에 세종대왕이라는 성군, 조선 후기에 정조대왕이라는 뛰어난 군주가 있었기에,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500년의 국운을 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한 세월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단한 왕조였음도 사실입니다. 전대미문의 비극중의 비극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11세에 목격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25세에 임금에 오른 정조는 반대파들의 극심한 포위망 속에서도, 이른바 ‘문예부흥기’라는 치세를 이룩해냈습니다. 그것은 정조의 곁에 뛰어난 신하이던 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이 있었고, 규장각에서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의 검서관들이 제대로 보필해주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 위기와 변혁이 번갈아가던 시절, 굳은 충성심과 탁월한 경륜과 학식을 지닌 신하들이 공심으로 임금을 보필했기에 살아있는 동안의 정조는 성공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다산이 39세이던 1800년, 재위 24년째이던 49세의 정조가 급서하면서 세상은 또 바뀌고 말았지만 문물제도의 정비, 신해통공을 통한 서민상인들의 입장강화, 한강의 배다리, 수원의 화성축조 등 대단한 업적이 그런 신하들과 힘을 합해 이룩됩니다. 배다리나 화성은 정약용의 지혜에 힘입은 바가 많았음은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줍니다.
학자이자 사상가이고 뛰어난 기술자이던 다산과 정조와의 만남은 왜 그렇게 희화되었으며, 호칭에 있어서도 다산을 왜 검서관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사극 ‘이산’을 시청하다보면 역사적 사실이 너무나 명확한 것들이건만, 일체를 무시하고 픽션으로만 끌고 가고 있으니, 역사적 진실을 그런 사극에서라도 배우고 싶은 많은 시청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산은 자신이 기록한 자서전격인 「자찬묘지명」과 뒷날 정리된 『사암연보』라는 책에 일생을 소상하게 밝혀두었습니다.
우선 22세 때에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백패를 임금으로부터 받으면서 다산과 정조는 최초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이 열리고, 바로 예문관 검열이라는 한림학사가 되고, 초계문신에 발탁되어 규장각을 드나들면서 정조를 보필합니다. 최소한 그런 진실을 바탕으로 해서 픽션이 구성되어야지, 이상스런 창고에서 다산과 정조의 만남이 이룩되고, 검서관이라는 서출의 학자들에게 주었던 벼슬을 다산이 역임한 것으로 한다면 역사극이 너무나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지 않은가요.
물론 다산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 매우 독창적인 이론을 펴고 실천까지 했지만 아주 신중하며 겸손했으니, 극에 보이는 경망스럽고 촐랑대는 처신을 했던 일은 없습니다. 희대의 사상가이고 탁월한 학자이자 경세가이던 민족의 스승, 다산이 재주풀이나 잘 하는 경망스러운 사람으로 묘사되는 일은 역사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다산이 어떻게 등장하여 어떤 경세술을 발휘하는가를 크게 기대하던 많은 시청자들을 더 이상 우롱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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