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신은 모든 일을 다스린다 - 마하트마 간디

문근영 2010. 4. 13. 12:15

법칙을 주는 이
 신은 그가 살아 있는 삶의 법칙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법칙'이라는 이름이나 '법칙을 주는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질 수 있다.
 신은 법칙인 동시에 법칙을 주는 이다. 따라서 누가 신을 창조했느냐는 질문은 성립할 수 없으며, 더구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그런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둑을 쌓을 수는 있지만 강을 만들지는 못한다. 의자를 만들기는 하지만 그 재료가 되는 나무를 만드는 일은 그의 능력밖에 있다. 인간은 그 마음속에 여러 형태로 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강이나 나무조차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이 어찌 신을 창조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그 반대는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신은 실행자도 만유의 원인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인격적인 신은 없다
 나는 신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는다. 진리는 나에게 신과 같으며 지상의 왕과 그의 법칙들이 서로 별개라는 것에 비추어보면 신의 법칙과 신은 결코 다른 것도 다른 사실도 아니다. 신은 이념이고 그 자신이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을 생각하는 것을 법칙을 어기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지 않으며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다. 신이 우리의 행동을 규제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서 신의 영역을 제한하게 된다. 신과 신의 법칙은 어느 곳에나 있으며, 모든 일을 다스린다.
 나는 신이 우리의 모든 요청에 자세히 대답해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구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가 즐긴다고 느끼는 자유 의지는 다만 사람으로 가득 찬 갑판 위에 있는 승객이 느끼는 정도의 자유일 뿐이다.
 비록 내가 느끼는 자유가 승객이 느끼는 것만도 못하다 할지라도 나는 그 자유를 소중히 생각한다. 기타를 읽으면서 늘 깨우쳐 온 것은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해 선택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의 결과를 조절할 힘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커다란 슬픔에 빠지게 된다.
 전능한 이는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이나 전능한 힘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힘이며 법칙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법칙 또한 어떠한 형태의 수정이나 첨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신의 의지는 고정불변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한다.

신의 인간성
 나는 한 번도 신과 얼굴을 마주해본 적이 없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이 나의 능력을 앞지른다면 나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신의 존재를 믿는 불멸의 확신이 있다. 이 세상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어 나의 이러한 믿음을 나눠 가진다.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갖춘 사람이라도 무지한 사람의 믿음을 흔들어 믿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신은 언제나 선하다. 신에게는 악의 속성이 있을 수 없다. 신은 인간을 그의 모습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모습에서 신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오만 때문에 인류는 고난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 신은 가장 탁월한 연금술사이다. 그의 존재로 해서 모든 철과 잡석이 순금으로 변하며 모든 악은 선으로 발전한다.
 신은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그의 피조물들은 살다가 죽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이라든가 그 밖의 모든 것은 영원한 속성이 되지 못한다.
 선은 신이다. 신으로부터 떠난 선은 생명을 잃어버리며, 베풀어질 때만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모든 은덕도 마찬가지다. 도덕이 우리와 함께 살아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신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되고 개척되어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선을 실현하고, 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선하려고 한다. 뿌리 없는 세상의 모든 도덕률은 먼지가 되고 말 뿐, 신에게서 멀어진 도덕은 생명이 없다. 신으로부터 나오는 도덕은 생명을 받고 나온다. 그런 도덕은 우리의 일부분이 되며, 우리의 삶을 고상하게 발전시켜 준다.
 반대로 선과 별도로 생각되는 신 또한 생명이 없다. 우리는 우리늬 순수한 상상을 통해 신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신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과 '또한 진리의 구현으로 신을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나는 위의 두 경우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아득히 먼 곳에서 바라보기도 하며,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얼굴을 맞대고 보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은 수백마일 밖에서 히말라야를 보는데 몇몇 사람은 몇 해에 걸친 여행을 한 후에 정상을 딛고 서서 히말라야를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신이 존재하며, 그의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진리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신의 힘
 시작이 있는 모든 일은 반드시 끝이 있다. 언젠가는 해와 달, 지구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 신만이 불멸이며, 소멸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그런 신을 표현하는 말이 있겠는가?
 신은 지적인 활동을 통해 이해되지 않는다. 지력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를 인도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믿음에서 나온 경험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 더 많은 체험과 깨우침을 얻은 이들의 경험을 통해서 배워가야 한다. 그리고 순수한 자기 경험보다도 못한 가르침에 의해서는 도움을 받지 말아야 한다. 완전한 믿음은 경험의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
 신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안다. 그러므로 나는 자주 진리가 신이라고 말한다. 한계가 지워진 우리 인간들은 절대적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다.
 나는 위대한 힘을 알라나 쿠다 혹은 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진리의 이름으로 부른다. 나에게 진리는 신이며, 진리는 모든 계획을 초월한다. 온전한 진리는 신의 가슴속에 자리잡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가르침 받아왔다. 어느 영국 사람은 나에게 진리는 깨우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진리는 알려진다. 그러나 그 정도는 우리 지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은 전능하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준다.

신의 지배
 오늘날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반기독교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을 얘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사탄의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은 통탄할 현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 신의 길을 따라간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와 같은 부패나 맹목적인 이익 추구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 주림과 벌거벗음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면전에서 응시한다. 이런 모든 것은 신의 나라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며 사탄과 반기독교적인 현상들이다. 우리는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신의 지배가 이 지상에 베풀어지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의 행동은 사타의 유혹을 물리치고 신의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신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인간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없앨 수 있다.
 보편적인 신의 의지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을 따를 마음만 있으면 이해하고 실행하기가 쉽다. 그런 일이 어려운 것은 나쁜 습관에 젖어 있는 인류가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속 발전한다. 아무것도 그대로 서 있기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신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늘 그러하며 그러면서도 항상 움직인다. 우리는 신의 속성에 대해 근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항상 앞으로 나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나는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보람있는 삶을 영위하려면, 진리와 비폭력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이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 들이다.
 신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방황하는 마음은 믿음의 전당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다.

악의 창조
 세상에 악이 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 역시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답을 할 뿐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운 곳도 있는 것처럼 선이 있으면 악도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우리 유한한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원리이다. 신 앞에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빌어 악이란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일 뿐 신의 말은 아니다.
 인도의 경전에서는 세계를 환상이라고 한다. 그런 설명 역시 불완전한 인간의 어리석은 입놀림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문제로 더 이상 내 머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비록 내게 신의 머리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준다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적 성장을 위해 신은 늘 선한 사람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어떠한 합리적 과정으로도 악의 존재를 논증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신과 같은 위치에 서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악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만 볼 뿐이다. 그리고 신이 악의 존재를 세상에 허용하는 한 신도 오랜 고통과 참음의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본다. 나는 신에겐 악이 없다는 것을 안다. 신은 악을 만들었지만 악에 의해 영향 받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생명을 걸고 악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신의 의미도 결코 깨우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보잘것 없고 제한되나마 나의 경험을 통해서 믿음을 다져왔다. 나는 순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신에게 가까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 나의 믿음이 지금처럼 변명에 그치지 않고 히말라야 산처럼 든든하거나 그 산 정상의 눈처럼 하얗게 빛날 수 있다면 거기서 더 무엇을 바랄까?
 과학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신은 선과 악의 바탕에 동시에 존재한다. 신은 자객의 칼뿐만 아니라 의사의 수술용 칼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선과 악은 인간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서로 함께 있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으며 어둠과 밝음, 신과 사탄을 각각 상징한다.
 신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 유쾌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선을 책임지고 있다면 그는 당연히 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진실로 신이 무엇인가 모르는 데서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신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표현을 초월한다. 그는 법칙을 만들며, 법칙 자체이기도 하고, 또한 법칙의 집행자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람도 신의 이러한 능력을 사칭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완벽한 독재자일 것이다. 그런 능력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에게만 어울린다.
 외면 세계는 내면 세계의 투영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선량하면, 모든 세계는 그에게 선량하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악에 물들었다고 생각하려 하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악의 씨가 숨어 있다는 뜻이 되고 만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악의를 품어서도 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악을 퍼뜨리는 소문에 쉽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신호이다.
 
기적
 나는 기적을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한다. 신은 기적을 통해 일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신의 뜻이 나타나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기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가 만든 법칙의 작용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신과 그의 법칙은 하나다. 그의 법칙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진이나 폭풍우까지도 그의 의지를 벗어나지 않으며 풀잎 한 줄기도 그의 뜻을 따라 자라야 한다. 사탄은 그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하며 그의 의지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탄은 없다.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악한 사람에서 선한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다. 신은 결코 마법을 쓰지 않는다. 신 또한 그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법칙은 국가의 법과는 다르다. 국가의 법에는 잘못된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신의 법은 그렇지 않다. 만약 신이 그 자신의 법칙을 뛰어넘어 행동한다면 세계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신의 현신
 신의 의지는 모든 생명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신의 현신이라고 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미래의 세대는 그 세대 중 특별히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을 일컬어 이러한 이름을 붙일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 일로 해서 신의 위대함이 손상되지 않으며 진리에도 아무 나쁜 영향이 없다.
 신의 의지가 인간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높은 정신적 열망의 표현이다. 사람은 신 앞에 있기 전에는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뤄 평화를 얻기 어렵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유일한 가치 있는 욕망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 실현은 기타에서 다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그 밖의 다른 모든 경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예언자들이나 신의 의지를 전했던 옛날 사람들을 믿는 것은 쓸모 없는 미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정신적 욕구의 충족이다.

신의 법칙
 인간의 언어는 신의 길을 불완전하게 전할 뿐이다. 나는 신의 길은 표현될 수 없으며, 이해조차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신을 묘사하고자 할 때, 전달되기는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동원해야 하는 수단이 언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의 법칙이나 그들이 하는 일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가장 훌륭한 과학자나 가장 위대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겨우 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신은 아버지 같은 인간적 존재가 아닐뿐더러 신의 역할과 영역은 무한하다. 그는 자신의 아주 미세한 부분으로도 내 삶 전체를 지배한다. 나는 그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는 나뭇잎새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쉬고 있는 숨 하나하나까지도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
 신과 그의 법칙은 하나다. 법칙은 바로 신이다. 그에게 속하는 모든 속성은 단순한 속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속성이며 진리이기도 하고, 사람이며 법칙이고 그 밖에 인간이 이름 붙일 수 있는 수백만의 모든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으며, 자연 법칙의 중지나 위반에는 절대로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나 제한된 존재인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서 우리가 만든 제한을 신에게 부과한다. 우리는 신을 모방할 수 있지만 신은 우리를 모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 시간을 쪼개지 못한다. 신의 시간은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으며 미래가 있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백 년쯤의 인생은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한 조각 덧없는 찰나에 불과하다.

자연의 가르침
 문명화됐거나 그렇지 않은 사회든 간에 지진 같은 재앙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는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늘의 꾸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될 때 사람들은 기도하고 참회하며 스스로를 깨끗이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신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재난은 신성이나 자연이 그저 변덕스런 마음으로 행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은 행성들이 천체의 조화 속에서 지정된 궤도를 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고정된 법칙을 따른다. 다만 우리가 그 법칙을 모르고 그들을 재앙이나 천재지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우리의 존재는 여자들이 팔목에 끼고 있는 유리팔찌보다도 훨씬 부서지기 쉽다. 유리 팔찌는 장롱 깊숙한 곳에 보물처럼 모셔두면 몇 천 년이라도 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너무도 나약하기만 해서 눈깜작할 사이에도 지워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니 우리는 숨쉬고 있는 짧은 순간이라도 높고 낮음의 차이를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해서 지진이나 그 밖에 다른 천재지변 혹은 천명이 다했을 경우 창조자를 부끄러움 없이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물리적 변동이나 재난에는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가 일식을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앞으로는 그런 지가변동도 언제쯤 일어나게 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또 한 번의 인간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승리가 무한히 계속된다 해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아의 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내면의 순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신의 목적을 좀더 정확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서 언제라도 그가 우리를 부를 때 그를 부끄러움 없이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도록 준비했으면 한다. 또한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어려움을 함께 하도록 노력해 주기를 부탁한다.

신의 이름들
 신은 수천의 이름을 가졌다. 아니 신은 오히려 이름이 없다. 우리는 아무 이름이나 우리 마음에 맞는 이름으로 신을 숭배하고 기도해도 된다. 어떤 이는 그를 라마(Rama)라고 부르고, 또 다른 이들은 크리슈나(Krishna)라 부르며, 라힘(Rahim)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신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모두 같은 정신을 섬기지만, 음식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름도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모두 각자의 조직이나 문화에 따라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 그리고 내면에 머무는 전능한 신은 우리의 가장 깊은 느낌들을 살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요구에 응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든 기도든지 간에 입술로 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배나 기도는 벙어리나 말더듬이도 할 수 있는 것이며, 무지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나쁜 독으로 가득 찬 사람의 기도는 아무리 해도 들리지 않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도는 잘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깨끗하게 씻어내야 한다.
 나는 내가 그러하다고 믿는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신이 창조적이기도 비창조적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현실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원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고, 알려질 수 없는 것을 깨우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말은 주춤거리게 되고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며, 가끔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베다에서는 브라만을 표현하면서 "이것이 아니고", "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표현을 쓴다.
 나의 의견으로는 라마(Rama)나 라하만(Rahaman), 신이나 크리슈나(Krishna) 같은 이름들은 모두 모든 힘 중에 가장 센 힘인 보이지 않는 힘에 이름을 붙여보려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애를 쓴다. 그런 시도를 계속하는 도중, 우리는 경건한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어린애가 한 번 일어서서 걷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역시 나이를 먹지 않는 신의 무한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표현은 과장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이처럼 지극히 쓸모 없는 언어를 통해서 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위대한 영혼의 스승이 보낸 63통의 편지-마하트마 간디 지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