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간디의 포월적 영성과 비폭력적 경제 이상

문근영 2010. 4. 9. 10:31

간디의 포월적 영성과 비폭력적 경제 이상

이은선(세종대교수)


A. 간디의 포월적 영성

자신의 생의 모습을 하나의 '진리와의 실험'(My experiments with Truth)이라고 밝히는 간디는 그 자서전에서 남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된 저항적 삶의 진정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다.

"내가 비록 점점 더 인도사회 봉사에 전념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동기란 다름 아닌 나의 '자기실현에 대한 염원'이었다. 나는 '섬김'을 나의 종교로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신은 오직 섬김을 통해서만 만나질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 나는 원래 친구의 음모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생계를 벌고자 남아프리카로 왔으나, 그러나 나는 매번 또다시 자연스럽게 발견하기를 자기 실현을 위한 싸움 속에서 신을 찾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이상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간디 삶의 진정한 모습은 바로 신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그것이었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 삶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현대의 세 사람을 지적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경전에 대한 깊고 폭 넓은 이해를 가지고," "결코 한 번도 내적 평안을 잃어버림이 없이," "신을 얼굴로서 직접 마주보려고 갈망하는" 레이챤드바이이고, 두 번째는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의 톨스토이이고, 세 번째는 『이 마지막자에게도』(Unto this Last)를 쓴 영국의 러스킨이라고 한다. 간디는 이 사람들에게 깊은 종교적 영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신의 영혼에서 구루(Guru)의 자리는 비워져 있고 자신의 추구는 계속될 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완전함에 대한 끝없는 추구는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신과 이상의 모습을 어떤 한정된 틀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간디는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 목소리에 따라 더욱 더 종교에 대한 공부에 정진해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간디가 그 목소리에 따라 자신의 전통종교 힌두교에 머물면서 탐구를 계속하여 발견한 사실은, 먼저 "신은 진리이다"God is Truth)라는 것이었다. 간디의 고백에 따르면, 이 진리로서의 신 이해는 더욱 전개되어 나중에는 "진리는 신이다"(Truth is God)로 되고, 그리하여 신을 찾아가는 그의 삶은 곧 "진리와의 실험"이 된 것이다.
간디 사상의 근간이 되는 이 '진리'(satya)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존재'(being), 또는 '실재'(reality)를 뜻하는 '사뜨'(sat)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도전통(힌두교의 리그베다와 우파니샤드, 불교, 자이나교, 요가학파, 베단타학파, 바가바드기타)에서 가장 고귀한 궁극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진리'(satya)를 바로 그 궁극적 실재와 동일시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진리는 그 안에 다른 수많은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는 최고의 원리이다. 이 진리는 단순히 말에서의 진실됨 뿐만 아니라 생각에서의 진실됨도 말하며, 또한 우리 사고 속의 상대적인 진리개념을 의미할 뿐 아니라 절대진리, 영원한 진리를 뜻하고 그것이 곧 신이다. 세상에는 신에 대한 수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현현이 또한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 앞에서 나는 경탄하고 전율하지만, 나는 오직 진리로서의 신만을 경배한다. 나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찾아가고 있다." "진리는 신이다. 이 정의는 나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준다."

간디는 또한 신을 "우주만물에 가득 차 있는 신비한 힘"으로 보고 "생명의 근원"으로 보면서 그것을 결코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신(神)처럼 한 인격의 모습으로만 한정시킬 수 없다고 본다. 신은 궁극적으로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단지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그것을 느끼고, 그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는 그러한 존재라고 간디는 고백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신은 우리 바깥의 또는 우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인격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관통하며 모든 것 속에 내재해 있다. …… 그는 모든 것을 듣고 우리의 가장 내밀한 생각도 알고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며, 바로 손톱이 손가락에 가까운 것보다 더욱 더 가까이 우리에게 있다."

이렇게 신이 우리 삶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의 법이고 자연의 법이며, 또한 온 우주에 미만해 있는 생명의 법이라고 보는 간디의 신관은 전통적인 의미의 인격신과 내재신, 유일신과 무신론, 정신과 물질들의 구별을 무색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신을 모든 인간적인 규정과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참으로 단순하게 '진리'와 '사랑'으로 이해하는 간디는 그리하여 모든 종교들의 "본질적인 하나됨"을 역설한다. 그는 자신이 '종교'라는 말로서 이해하는 것은 결코 힌두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것,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그를 정화시켜 진리에로 묶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의 뿌리는 '무엇을 묶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와 같은 의미의 '뿌리'는 '무엇을 지탱하는 것'으로서 종교의 뿌리는 '도덕'(morality)이다.
간디는 자신이 오랫동안의 탐구 결과 종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것이란 즉, ① 모든 종교는 진리이다. ② 모든 종교는 그들 안에 그 나름대로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③ 모든 종교는 그에게 그 자신의 힌두교만큼이나 친밀하다 라는 것이다. 간디에 따르면,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종교는 그 근원에서는 하나이고, 그것들은 인류의 진화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마치 한 정원에 피어 있는 각기 다른 꽃들과 같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종교들로부터 배워야 하며, 이 다른 종교들을 탐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종교를 더욱 더 순수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기도는 신이 그에게 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빛을 주시라고 간구할 것이 아니라 "신이여! 그에게 그가 그 자신의 최고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빛과 진리를 주소서"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던 오류들에 대해 눈이 어두웠던 것이 아니어서 누구보다도 그 안의 폐습과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힌두교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인류의 영적 진화에 가지는 의미를 믿었기 때문에 간디는 끝까지 거기에 머물렀고, 또한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하나됨을 믿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어떠한 종교 대화가들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했다. 그러한 자신의 입장을 그는 서슴없이 '힌두교 종합주의'(Synthesis Hinduism)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이런 간디의 입장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많은 종교연구가들에 의해 종교간 대화의 한 전형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포월적 영성은 오늘 우리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후세의 역사가들이 우리의 20세기를 바라보면서 가장 흥미롭게 관심할 사건이란 결코 로켓의 발명이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동·서 종교간의 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한 그것 때문에 이제 인류는 '포스트모던'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했듯이, 간디의 위와 같은 종교 이해는 그래서 이미 '제3의 물결'을 얘기한 미국의 토플러에 의해서 오늘날 이 '제3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위성을 가진 간디"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B. 간디의 비폭력적 경제 이상

  이미 언급한 대로 남아프리카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더 종교적 성찰을 키워 나가던 간디는 1904년 영국 시인 러스킨(J. Ruskin: 1819 -1900)의 {이 마지막자에게도}(Unto this Last)를 읽고 감동하여 그 이상에 따라 '페닉스농원'이라는 일종의 수도장을 겸한 생활공동체를 만든다. 그는 러스킨의 이 '마지막자에게도'를 나중에 구자라티어로 '사르보다야'(the welfare of all)로 표현했는데, 러스킨의 의미를 다음의 세 가지로 이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① 한 개인의 안녕은 모든 사람의 안녕 안에 포함되어 있다.
② 한 법률가의 일은 한 이발사의 일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는데, 그것은 '모두는 각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자기 생계를 꾸릴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③ 육체노동의 삶, 예를 들어 농부나 수공업자의 삶이 제일 가치 있다.

  자신이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던 {바가바드기타}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여기서 확인한 간디는 그것을 자신의 실제생활에 적용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는 같은 해 창간된 기관지 {인디언 오피니언}도 이 농원으로 옮겨 모든 입소자는 농장과 신문사에서 자기 생계를 위해서 직접 일하고, 인종이나 민족의 구별 없이 매달 똑같은 3파운드의 고정 임금을 받도록 했으며,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정신훈련을 쌓아 가도록 했다. 이 공동체 모임은 1910년 그가 다시 요하네스버그 근교에 세운 '톨스토이농원'과 함께 남아프리카에서 '사띠아그라하'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신의 현현으로 느끼는 간디는, 이 '사르보다야'의 이상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인도의 가장 낮고 천한 한 사람을 인도의 가장 큰 통치자와 같은 사람으로 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이란 한 "보이지 않는 전체"(invisible whole)라고 파악한 간디는 이러한 자신의 이상을 "참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사회주의"의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평등하게 보고, 귀족도, 농부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그리고 고용주도 피고용자도 모두 같은 존재로 보게 하는 한 아름다운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마지막자에게도"의 의미로 깨닫고 있는 사회주의란 결코 서구의 무신론적 폭력적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에게 사회주의란 오히려 한 '이즘'으로 떠오르기 이전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어떤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닌 진리이신 신, "살아 계신 생명의 힘"으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간디는 '진리'와 '비폭력'이 '사회주의' 안에서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기초는 "경제적 평등"이다. 경제와 윤리가 하나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그에 의하면, 경제가 한 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의식을 해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도덕적인 것이고 죄악이다. 이웃의 땀을 짜내서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일, 그것을 통해서 만들어진 생산물을 사고 즐기는 것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제에서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완전고용"(full employment)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인간으로 하여금 누구나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이 필요한 것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 기회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을 때, 그것은 타락이고 비도덕이다. 굶주리고 더럽고 게으른 사람들이 유일하게 신의 현현장소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곳, 그것은 "일과 양식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간디는 이러한 생각들에 근거하여 당시 서구 자본주의와 러시아에서 실험되는 공산주의에 대해 예언자적 비판을 가한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사회에서 부와 일자리가 편중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볼셰비즘은 현대 물질문명의 맘몬숭상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판단한다. 간디는 경제적 평등을 '사르보다야' 이상의 기초로 보았지만, 물질적 진보만을 최종 목표로 삼는 공산주의는 삶의 궁극적인 것을 잃어버린 것이고 또한 지나친 목표지향적 사고는 성공에 집착하는 커다란 폭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간디는 설사 가장 고상한 목표에 봉사하는 일이라도 폭력적 방법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힌다.
  간디의 현대기계문명에 대한 비판과 육체노동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회 모든 구성원의 완전고용을 주장하는 간디는 기계가 그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인간에게 필요한 노동까지 앗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다른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서 노동을 빼앗는 것은 죄악이다. 그는 기계 자체에 대한 'No'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현대문명의 기계열광주의, 그리고 그것이 소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부분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이고, "나는 우리나라의 깨어나지 못한 수천만의 사람들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그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이 목표를 위해서 나는 아직 기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간디의 경제원칙은 최대한의 이윤과 효율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폭력적 경제원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의 경제원리에서의 비폭력주의란 바로 그 사회 구성원 모두 지극히 작은 한 사람까지라도 같이 생각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뒤쳐짐을 끌어올리려는 인내와 기대림의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극대한의 효율만을 추구하는 현대과학기술문명에 대해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그에게 경제의 참 목표란 사람의 영적 성장이지 무제한의 욕구충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육체노동이 우리의 욕망을 줄이고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해 준다고 역설하는데, "브레이드레이버"(Bread-Labour)를 진리고수 운동자들의 한 기본덕목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육체의 유지는 육체노동으로부터 와야 하고, 정신적 일이란 정신의 계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마의 땀으로 살아간다면 세계는 드디어 천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빵을 위해서 육체노동을 하고 그 다음에 시인이나 의사나 법률가, 교사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오로지 사회봉사를 위해서 일하는 사회를 꿈꿨던 간디는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말로 자신의 인간과 삶에 대한 포괄적인 이상을 뚜렷이 밝혀 주고 있다.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빵을 손의 노동 ― 이마의 땀 ― 을 통해서 얻도록 만들었고, 그의 머리는 물질적 욕구를 증가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고갈시키고 파괴시키는 사치로 둘러싸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도덕적 존재를 위해서 ― 창조자의 뜻을 아는데 ― 인류에게 봉사하고, 그리하여 참으로 그 자신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간디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시골 농부의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동경했고, 농부는, 그에 따르면 "세상의 소금"이다.
  경제의 참 목적을 도덕에 있다고 본 간디는 경제에 있어 두 가지 중대한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것은 ① 모든 사람들에게 가난을 공평하게 나누는 문제와 ② 어떠한 집중화도 거부하면서 모두가 생산체계에 참여하는 문제였다. 무제한의 기술과 기계의 도입으로 복잡한 생산과정을 거쳐 잡다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대신에 간디는 가능한 한 단순한 기계의 도움으로 일반 대중에 의해 행해지는 생산을 얘기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걸쳐 펼친 '카디'(kahdi: 손물레질로 짠 옷감)운동이었다.
  간디에 따르면, 이 카디 운동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인도의 자치, 즉 '스와라지'(자치, swaraj)라는 말은 성스러운 말로서 그것은 '자기규율'(self-rule)과 '자기통제'(self-restraint)를 뜻하는 말이지 일반적으로 '자기해방'(independance)을 뜻하는 모든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의 의미가 아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모든 국가가 그 나름대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숨쉬는 데 적합한 것처럼 그렇게 각 나라는 자기의 일을 스스로가 처리하는 데 적합하다는 말이다." 그에게 '스와라지'라는 말은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의 자유"(freedom for the meanest of our countryman)를 의미한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인도가 단순히 영국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내적·외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단순히 이 왕(王)을 저 왕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디가 원하는 자치란 대단히 근원적인 것이며, 그것은 그 사회의 가장 최소한의 단위인 개인과 가정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 기초의 건강함 위에서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민족의 자치란 각 개인의 '자기통제'의 합이며, 그러한 자치란 오직 개인들이 자신들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완성할 때 이루어진다." '스와라지'를 "참된 민주주의"(true democracy), 신을 "최고의 민주주의자"로도 지칭하는 그는, 이 자치란 자기 희생과 억제, 국민의 도덕적인 힘에 기초하여 얻어진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삶의 필요물을 가장 직접적인 이웃들의 수고로 얻어진 것을 가지고 충당하는 '스와라지'는, 따라서 그에 의하면 "한 종교적 훈련"이다. 즉 그 일을 위해 자신들에게 어떠한 육체적인 불편이 오더라도 감내하는 인내이며, 그것의 실행자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에 따르면, 인도를 구하는 것은 결코 서구적인 산업화가 아니다. 산업화란 완전히 착취에 근거해 있는데, 그것은 도시인들에 의한 농촌의 착취, 서구제국에 의한 아시아·아프리카의 착취, 그리고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에 근거한 것이므로 오히려 점점 더 부와 일자리의 편중을 가져오고 인간의 욕망을 늘릴 뿐이라고 한다. 간디는 현대 산업화를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했는데, 그것은 ① "쉼이 없는 활동"(ceaseless activity)과 ② "시간과 공간의 탈취"(annihiliation of space and time)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무한한 욕망의 펼침을 현대 산업문명으로 본 간디는 그것의 평가에 대하여 당시 타고르와 네루와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간디의 확고한 확신은 서구적 산업화는 이제 그 미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욕심에 근거한 것이고 모든 삶의 구성원의 하나됨과 협동 대신에 경쟁, 만족 대신에 갈망, 조화 대신에 갈등과 폭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와라지'란 개인을 중시하지만 밀림의 동물의 법인 무제한한 개인주의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로지 진리와 비폭력, 겸손과 사랑의 법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스와라지'란 또 하나의 '비폭력의 과학'(science of non- violence)이고, 또한 오늘날 전통의 경제학과는 다른 '비폭력의 경제학'과 '작은 경제학'이 강조하는 것은 가난을 나누는 것이고 욕망을 줄여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간디는 인도의 이상사회의 모습을 "촌락공동체"(village community)와 "지방분권"(decentralization)의 모습에서 찾는다. 그는 말하기를, 인도가 비폭력의 법에 따라서 발전하려면 많은 것이 분권화 되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집중화(centralization)란 도대체가 비폭력의 법과는 일치할 수 없고, 인도가 참된 자유를 얻기 원하고 세계가 또한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시가 아닌 시골에, 궁전이 아닌 소박한 집에 살기를 원해야 한다. 그 이유는 '비폭력'과 '진리'란 오직 시골생활의 단순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간디는 자신의 '스와라지'촌에 대한 이념을 "한 완전한 공화국"(a complete republic)이라고 한다. 즉 삶의 다른 부분에서는 서로의 의지가 어쩔 수 없지만, 그 자신의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외부에 종속됨이 없는 사회, 그리하여 그 공동체의 첫 관심은 그들의 곡식생산이고 직물생산인 사회, 이것이야말로 비폭력적인 자기충족적 사회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간디는 모든 촌락이 독립인도의 "중추신경"(the nerve-center)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인도가 더 이상 봄베이나 켈커타 같은 대도시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촌락들에 살고 있는 4억 인도인들에 의해서 알려지기를 소망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인도만이 오히려 외국의 침략에 대해서 더 잘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촌락공동체에 근거한 '스와라지'의 이상은 오늘날의 우리 ― 국내적으로도, 또한 국제적으로도 ― 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세계화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온 국토가 도시화되어 식량과 필수생활용품이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과 나라들에게 종속당하는 상황에서, 간디의 말대로 하면 이런 모든 현상들은 현대산업사회·정치·경제의 폭력주의와 집중화의 산물이다. 이것에 저항하면서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는 작은 경제학, 인간과 자연에 우호적인 또다른 정치, 경제, 이것을 토플러 같은 사람은 제3의 물결을 타고 나타난 "위성을 가진 간디"의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각 개체의 존재를 귀중하게 여기고 그 개체를 전체의 안녕을 위해 서로 연결시키고 조화시키는 참으로 유기체적이고 전일적인 사고이다. 간디의 말대로 하면 "고립된 독립"(isolated independence)이 세계의 목표가 아니라 "서로간의 연결"(interdependence)이 그 참 목표가 된다는 말이다.

<참고문헌>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 한길사
M. Gandhi, Mein Leben, Suhrkamp Taschenbuch Verlag 1983.
M. Gandhi, The Selected Works of M. Gandhi, Navajivan Publishing House 1968.
이은선, 『한국교육철학의 새지평』, 내일을 여는 책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