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진실(眞實)을 찾아서
삼성문화문고, 강봉식 역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요즈음 흔히 과거 천 년을 말한다. 그러나 과거 천 년간 우리 인류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간디는 비교적 최근에 사랑과 평화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더욱이 그는 당시의 세계적인 강대국과 대항하여 비폭력(非暴力)으로 (영국이 결코 독립시키려하지 않았던) 그 큰 나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이루어 내었다. 나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이 과거 천 년간 비폭력으로 이루어 낸 가장 큰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언제인가는 폭력, 즉 전쟁을 사용하지 않고 국가간의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현재 개인간의 문제점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웠듯이. 그러나 국가간의 일을 폭력이 아닌 방법으로 해결한다고 하여 서로 고도의 잔재주를 부리거나, 위협을 사용하는 정도의 낮은 수단만을 이용하려 한다면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간디의 비폭력적 개념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수 있다고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가 비폭력으로 이루어 낸 한 대륙의 독립은 일단 비폭력이 성공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많다. 비폭력을 정치적인 일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간디가 권총으로 암살을 당한 일. 그의 힘으로 독립한 두 나라가 그 동안 벌인 전쟁(어떤 경우는 24 시간에 탱크 150 대가 부수어 질 정도로 격렬했다). 그리고 인도가 가지고 있는 원자폭탄.
그러나 이 아이러니가 간디의 개념이 옳지 않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간디가 뛰어난 인물이며, 그에 의해 비폭력 운동이 전적으로 이끌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인류가 모두 그의 높은 정신적인 경지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가 생존해 있을 때는 서로 협력했던 그의 동족인 인도 사람들도 지금까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간디보다 2400 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인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으나 이것이 석가의 가르침이 옳지 않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전쟁이라는 폭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명제이다. 요즈음에는 거의 잊혀지고 있다고 생각되나 내가 어렸을 때는 전 세계가 그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불렀었다.
간디는 자기의 깊은 세계에만 빠져있던 사상가가 아니다. 혹은 순진하게 진리만 믿고 그것만을 실천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앞서 소개한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이 옳은 것을 찾으면서도, 주위 사람의 잘못된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는 능력과, 주위 사람들의 잘못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지성을 갖춘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다. 실수나 실패 후에 올바른 길을 찾아내어 끊임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끈질긴 투사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위인들의 자서전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끈질김을 그분들이 직접 적은 글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분들이 큰 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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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가 읽은 삼성문고의 책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아래의 근래에 나온 책을 소개한다.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제목 : 간디 자서전 / 저자 : 간디 / 출판사 : 한길사 / 출판일 : 1983년 12월 01일 / 페이지수 : 582 / 판형 : A5 / 정가 : 13,000원
제목 : 간디 자서전 / 저자 : 간디 / 출판사 : 삼성출판사 / 출판일 : 1997년 08월 20일 / 페이지수 : 506 /판형 : A5 / 정가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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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1850 년에서 1900 년 사이에 태어난 이름있는 분들의 생몰년대를 적어둔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태어난 시대이다.
이상재 1850-1927 갑오개혁 후 학무국장
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
Joseph John Thomson (1856.12.18~1940.8.30)
Pierre Curie (1859.5.15~1906.4.19)
드뷔시 1862 - 1918
남궁억 1863-1939 황성신문 창간, 무궁화
슈트라우스 1864 - 1949
시베리우스 1865 - 1957
서재필 徐載弼 1866.11.20~1951
Marie Curie 1867.11.7~1934.7.4
Wilbur Wright 1867∼1912
Robert Andrews Millikan (1868.3.22~1953.12.19)
Gandhi, Mohandas Karamchand (1869.10.2~1948.1.30)
Ernest Rutherford (1871.8.30~1937.10.19)
라프마니노프 1873 - 1942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1.30~1965.6.24)
쇤베르크 1874 - 1951
라벨, 모리스 1875 - 1938 프랑스 근대 음악에 금은보석의 찬란한 관을 씌워준
이승만 1875-1965 배재학당, 독립협회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1896[만 20 살] 일본 중위 타살
안창호 安昌浩 1878.11.9~1938.3.10
Albert Einstein (1879.3.14~1955.4.18)
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2.21~1953.3.5)
Pablo Ruiz y Picasso (1881.10.25~1973.4.8)
曺晩植 1882~1950.10.18
스트라빈스키, 이고르 1882 - 1971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30~1945.4.12
림스키코르사코프 1884 - 1909
Niels Henrik David Bohr (1885.10.7~1962.11.18)
Schrodinger, Erwin (1887.8.12~1961.1.4)
Henry Gwyn-Jeffreys Moseley 1887.11.23~1915.8.10 1 차 대전에서 사망
Adolf Hitler 1889.4.20~1945.4.30
宋鎭禹 1889.5.8~1945.12.30
胡志明/호지명 1890.5.19~1969.9.3
De Gaulle, Charles Andre Marie Joseph (1890.11.22~1970.11.9)
金性洙 1891.10.11~1955.2.18
申翼熙 1892.6.9~1956.5.5)
Louis Victor de Broglie (1892.8.15~1987.3.19)
張澤相 1893~1969
李起鵬 1896~19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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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5 서문
진정한 자서전을 쓰자는 것이 내 목적은 아니다. 다만 내가 진실(眞實)을 찾아나가면서 해본 갖가지 일을 얘기해 보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갖가지 일이 곧 내 생활을 이루고 있으니, 그 얘기를 하자면 자연 자서전일 될 것이다.
p 16
내가 얻고 싶은 것, 지난 30 년 동안 얻으려고 애타며 애쓴 것 - 그것은 자기를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뵙는 일이요, 해탈(解脫)의 경지였다. 나는 이 목표를 찾아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내가 말과 글로 하는 모든 일, 정계에서 하는 모든 일은 그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성삼의 주(註); 이렇게 분명한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한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나는 늘 믿기 때문에 나는 일을 남 앞에 드러내놓고 했다.
[임성삼의 주(註); 전 세계의 위인들은 거의 모두 이 말(자기가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하고 있다. 단지 벼락부자가 이렇게 겸손한 말을 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실제로는 위인들이 한 일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벼락부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 경우에 있으면 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목사님들은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 분이 많으신 것 같으나, 나는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p 17
종교문제는 어린애들도 어른만큼 알 만한 것만 여기에 넣었다. 그런 문제를 내가 사심(私心)없고 겸허한 정신으로 얘기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정진(精進)하는데 좋은 양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실험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과학자가 최고로 정확, 진중, 정밀하게 실험을 하고도 결론을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고 늘 여유를 남겨두는 것과 같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자기를 깊이 성찰(省察)하고 자기를 되풀이 살펴보고 인간심리를 샅샅이 분석해보았지만 도저히 내 결론을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겠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말씀이 이 분이 인간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겸손이야 말로 모든 미덕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만은 주장할 수 있다. 즉, 그런 결론이 내게는 절대 옳은 것같고 현재로서는 완전한 것 같다는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이 말과 위의 문장이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을 진실, 진리로서만 숭배한다. 그 신을 나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아직 찾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찾아나가는 도상에서 나는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이라도 기꺼이 희생하련다. 그 희생으로 내 목숨을 바치라 해도 기꺼이 바칠 각오가 섰으면 한다. 그러나 이 절대진실을 깨닫게 될 때까지 나는 내가 아는 바의 상대적 진실을 지켜 나가야겠다.
[임성삼의 주(註); 정말 솔직한 고백이다. 위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 깊이 "이 분은 신을 찾았고, 절대적인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p 19
나 따위는 수백 명이 망해도 진실은 이겨야 한다. 나처럼 실수많은 인간들을 심판하는데 진실의 기준은 털끝 만큼도 낮춰서는 안된다.
[임성삼의 주(註); 뛰어난 분들의 공통점은 외형적인 온화함과, 내적인 극도의 엄정성(嚴正性)이다. 그리고 그 엄정성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제 1 장 빛의 계단 p 21
우리집안
간디 집안은 상인계급으로 원래 식료품상을 한 것같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2 대는 '카탸왓' 지방의 몇몇 독립주에서 총리를 지냈다. ...
[임성삼의 주(註); 흔히 인도 사회의 특성을 계급제도(카스트)라고 부르나 어느 계층에서는 이 정도의 움직임이 허용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재물을 모을 욕심이 조금도 없으셔서 우리에게 남겨준 재산이 별로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앞서의 벤자민 프랭클린의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p 26
나는 1869 년 10 월 2 일 태어났다. ... 학교에 들어간 것도 생각난다. 99 표를 다 외는 데 좀 힘이 들었다. 이 시절에 다른 애들과 어울려 선생님 욕만 하던 일밖에는 지금 생각이 안나니 필시 나는 머리도 나빴고 기억력도 시원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이 분의 자서전 만은 완전히 사실로 믿는다. 여러분도 책을 읽어보면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님 욕만 하던 일도 사실이라고 의심없이 믿는다. 단지 머리가 나빴다든가 기억력이 시원치 않은 상태가 일생동안 지속되었다고는 생각할 수는 없다.]
거북하지만 만 13 세의 내 결혼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 나는 나도 모르게 세 번 약혼했던 모양이다. 나를 위해 골라 놓은 처녀 둘이 차례로 죽었다고 들었으니 내가 세 번 약혼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세 번 째 약혼이 내 나이 일곱 살 때 성립된 것으로 나는 희미하게 기억한다.
조혼을 시켰다고 내가 아버지를 몹시 원망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든 것이 옳고 합당하고 기쁘게만 생각되었다. 또 나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임성삼의 주(註); 이 이외에도 결혼에 관계된 자세한 내용이 책에 있다.]
영국 갈 준비 p 28
1887 년 나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임성삼의 주(註); 만 18 세, 앞서와 같은 머리와 태도를 가지고도 늦은 것은 아니다.]
나는 '사말다스' 대학에 다니기로 했다. 입학을 하고 보니 망망대해(茫茫大海),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것이 어려웠다. 교수님들 강의에 흥미는커녕 따라갈 수가 없었다. 교수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대학의 교수들은 일류로 인정되고 있었다. 내 실력이 없었던 것이다. 첫 학기를 끝내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임성삼의 주(註); 집으로 돌아간 것이 잠시 학업을 중단한 것인지, 방학을 맞아서인지는 모르겠다.]
[중간 내용; 아는 사람의 설득으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 유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종교상의 이유로 반대했다.]
나는 세 가지 맹세, 술과 여자와 고기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것이 끝나자 어머니가 허락을 내리셨다.
런던 상륙 p 37
나는 배멀미를 조금도 안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꾸 불안해졌다. 선실 급사에게 말을 붙이는 데도 부끄럽기만 했다. 영어회와에 익숙치 못한 데다가 한 사람을 제외한 2 등 선실 손님이 모두 영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못했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와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 알아들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기 전에 머리 속에서 일일이 문장을 지어봐야 했다.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방법도 몰랐고, 고기가 안든 요리가 어느 것인지를 물어볼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식당에서 식사를 안하고 늘 선실에서 했다. 집에서 갖고 간 과자와 과일들만 주로 먹은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외국에 갔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p 40
유럽식 예절에 대한 최초의 수업을 받았다. "남의 물건을 만지지 말라. 인도 식으로 초면에 이것저것 물어서는 안된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 인도에서 할 때처럼 남에게 '써어'라는 존칭을 쓰지 말라. 하인이나 아래 사람들이 상전에게 말할 때 그런 경칭을 쓴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도 통용되는 예절이다.]
변호사 공부 p 42
유학간 목적, 곧 변호사 면허를 따는 이야기를 이제부터 간단히 해야 겠다. 한 학생이 정식으로 변호사 면허를 얻자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나는 약 3 년에 해당하는 12 학기를 이수해야 하고, 또 하나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학기이수"는 학기를 "먹는다"는 뜻이다. 즉 한 학기에 약 24 회 만찬회에 적어도 6 회를 참석해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실은 만찬을 나도 같이 먹는다는 뜻이 아니고 정한 시간에 출석하여 만찬회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뜻했다. 물론 모두가 잘 차린 음식을 먹고 준비된 좋은 술을 마셨다. 한 끼 비용은 2 실링 6 펜스에서 3 실링 6 펜스, 즉 2에서 3 루피였다.
호텔에서 먹는다면 술값만도 그만큼은 나가니까 이것은 싼 값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인도인에게는 소위 "개화파"가 아닌 이상, 술값이 식사값보다 더 든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나는 처음엔 큰 충격을 받았고, 어쩌면 그렇게 큰 돈을 술에 허비(虛費)하는가 싶었으나 후에는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런 만찬회에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빵과 삶은 감자와 배추 밖에는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4 명 한 그룹에 포도주 2 병씩이 배당되었는데, 나는 술을 전혀 안했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자기 그룹에 넣으려고 했다. 셋이서 두 병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만찬이 어떻게 변호사 자격에 보탬이 되는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알지 못한다. 이 제도가 시작된 처음에는 만찬에 참석하는 학생수가 적어서 변호사 회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고 연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회에 학생들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배워 세련되어지고, 또 말하는 능력을 기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다닐 때는 변호사들은 자기네끼리 상을 따로 하고 있었으니, 그럴 기회도 없었다. 이 제도는 차차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는데도 보수적인 영국은 이것을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원칙대로 수행된다면 상당히 좋은 제도라고 생각된다.]
법정(法廷) 변호사를 통칭 "만찬 변호사"라고 할 정도로 교과과정은 쉬웠다. 시험은 실제로 아무 가치가 없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 당시의 시험은 로마법과 관습법(慣習法) 두 과목이었다. 이 시험을 위해 정해진 정식 교과서들이 있고 이것을 항목별로 읽으면 되었는데 이것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2 주일 가량 로마법 노우트를 뒤적거리고 로마법 시험에 합격했고, 관습법 시험은 두서너 달 노우트를 읽고 합격하는 것을 나는 알았다. 시험문제는 쉽고 시험관은 관대했다. 로마법 시험의 합격률은 대개 95 내지 99 %, 최종시험 합격률은 75 % 이상이었다. 이처럼 낙제할 염려가 별로 없고 시험은 일년에 한 번이 아니라 4 번이나 있었다. 그러니 어렵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렇게 쉽게 변호사 자격증을 준다고 하여서 영국의 재판이 우리나라의 재판보다 수준이 낮고,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현재 대단한 경쟁을 뚫고 매우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능력있는 변호사만 가진 우리나라 국민은 이 능력있는 변호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가?]
그런데 나는 이것을 어렵게 치렀었다. 교과서는 모두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읽는 것은 사기행위라고 생각했다. ...
[임성삼의 주(註); 이런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시험에 합격, 1891 년 6 월 10 일에 변호사 자격을 얻고 11 일에 고등법원에 등록되고, 12 일에 귀국 길에 올랐다.
[임성삼의 주(註); 앞에서 1887 년 18 살에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했고, 한 학기를 인도의 대학에 다녔다. 그러므로 영국에 도착 후 3 년만에 변호사가 된 것이다. 대학에 대한 언급은 없다.]
불안 P 46
면허를 따기는 쉬웠으나 변호사 실무는 힘들었다. ...
더욱이 인도의 법률은 전혀 배운 게 없었다. ... 소송장을 쓰는 법도 배우지 못했고, 그저 망망하기만 했다. ... 도대체 내가 변호사업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웠다.
제 2 편 사람의 뜻, 하늘의 섭리 p 51
살림의 시작
나는 지방변호사만큼도 아는 것이 없는데 변호료는 그 배나 기대했다. 나에게 사건을 의뢰할 바보가 있을 리 없었다. ...
알고 보니 법정변호사는 아는 것 없이 겉멋만 부리게 되는 나쁜 직업이었다.
남아프리카로 p 57
[그 후, 장소를 옮겨 개업하고 소송신청서 등을 써주며 근근히 살다가 인도사람이 하는 남아프리카의 큰 상사의 고문 변호사로 떠난다.]
쿨리 변호사 p 61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과 마주친다. 법정에서 터어반을 벗으라는 명령을 들은 이야기, 기차에서 1 등 차표를 가지고도 화물칸으로 보내지는 것을 반대하다가 기차에서 쫓겨난 이야기, 마차의 차장에게 얻어 맞은 내용이 있다.]
마차의 차장은 내게 덤벼들어 내 귀를 호되게 갈겼다. 내 팔을 붙잡아 나를 끌어 내리려고 했다. 나는 마부석의 손잡이를 꽉 잡고, 손목 뼈가 부러져도 놓지 않을 각오를 했다. 승객들이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 자는 욕을 퍼부으면서 나를 끌어 당기고 치고 ... 나는 꼼짝 않았다. 그 자는 힘이 세고 나는 약했다. 승객 몇 명이 보기에 측은한지 고함을 질렀다.
"여보, 그냥 둬요. 때리지 말아요. 저 사람이 잘 못한 건 없소. 저 사람 말이 옳소."
"걱정 마쇼" 차장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으나 약간은 기가 죽어 더 이상 나를 치지는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영국의 치안이 미치는 곳에서도 대낮에 변호사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얻어맞는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 이런 경험이 쌓여 인도는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는 굳은 목적이 생긴다.]
종교문제 p 94
[열렬한 기독교 신자들의 모임에 나갔다.]
나는 그들의 신앙을 보고 기뻤다. 나를 위해 기도를 드려 주는 사람이 많았다. 찬송가가 참 아름다워 마음에 들었다. ...
나는 참석자들의 지성(至誠)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내 종교를 바꾸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천당에 가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기독교 친구들 몇 명에게 솔직하게 이런 말을 했더니 그들은 퍽 놀랐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고민은 더 깊은 데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육신의 아들이요, 예수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그 아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닮거나 바로 하나님이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닮거나 바로 하나님일 것이다. 내 이성(理性)으로는 예수가 죽음과 피로써 세상의 죄를 속죄했다는 말을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비유라면 일리가 있겠지만 말이다. ... 나는 예수를 하나의 순교자로, 희생의 화신으로, 거룩한 스승으로는 볼 수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십자가 위의 그의 죽음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모범은 되겠지만 거기에 어떤 신비로운 기적적인 공로가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이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경건한 생활은 다른 종교 신자들의 생활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바로 잡아 주는 힘은 모두 마찬가지다. 철학상으로는 기독교 사상에 별다른 독특한 점이 없다.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힌두교가 기독교보다 훨씬 앞설 것 같았다. 나는 기독교를 완전한 종교,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종교라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런 마음의 동요를 기회 있는 대로 기독교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으나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말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나는 기독교를 완전한 종교 또는 으뜸가는 종교로 여기지 못했거니와 또한 힌두교를 으뜸가는 종교라고 믿지도 못했다.
[임성삼의 주(註); 그렇다고 종교를 포기하고 종교가 없는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점도 간디의 훌륭한 면이다.]
[줄거리; 그 후 남아프리카의 나탈 지방에서 그 곳 인도인들의 선거권 투쟁을 도와준다. 그리고 '나탈 인도인 회의(會議)'를 결성한다. 간디 최초의 정치적인 활동이다.]
[인도로 돌아와 일을 시작할 때 남아프리카의 인도 사람들이 다시 불러 남아프리카로 돌아간다.]
제 3 편 풍우의 계절 p 133
p 137
나는 나탈[남아프리카의 지역 이름]의 백인을 길러낸 문명, 저들이 대표하고 지지하는 그 문명을 슬퍼했다. 이 문명을 늘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터라 나는 조그만 식후 모임에서 그 문명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했다. 백인들은 잘 참고 들었으나 나 못지 않게 진심으로 내 말을 받아들였다. ... 나는 그 연설에서 서양문명을 가리켜 동양문명과는 달리 주로 폭력(暴力)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중 한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백인들이 그들의 협박대로 나온다면 당신은 폭력주의에서 어떻게 지켜 나가렵니까?"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법에 넘기지 않을 용기와 슬기를 하나님이 내게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을 노여워하진 않아요. 그들의 무지(無知)와 좁은 마음이 서운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기네 하는 일이 옳고 합당하다고 정말 믿고 있는 줄을 나는 압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노여워할 이유가 없지요."
p 145
보어 전쟁 이야기를 해야 겠다.
[참고; 보어인(남아프리카에 사는 네덜란드계 백인) 공화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트란스발), 오렌지 자유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1899. 10. 11~1902. 5. 31)]
[임성삼의 주(註); 이 보어전쟁에서 30 세의 간디가 참전하여 사회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이 동일한 전쟁에 후일 영국의 수상이 되어 2 차 대전을 이끈 처칠(Winston Churchill)이 25 세의 나이로 신문 특파원이 되어 취재한다. 그는 적진 깊숙히 들어갔다가 보어인의 포로가 된 후 극적인 탈출로 영국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처칠은 곧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 생활을 시작한다. 이 전쟁 이전에 처칠은 인도에서 영국군 장교로 근무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제대하였었다. 인도의 독립을 놓고 서로 겨룬 간디와 처칠이 젊은 시절에 남아프리카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후일 처칠은 간디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영국 여왕 앞에 반 나체의 몸으로 나타나는 사람."]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내 개인적 동정은 보어 사람들 편에 갔다. 그러나 그때 내 생각으로는 이런 경우에 내 개인의 소신을 밀고 나갈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
다만 여기서는 영국통치에 대한 내 충성심이 이 전쟁에서 영국 편을 들게 했다는 말만 해둔다. 내가 영국의 한 국민으로 내 권리를 주장하려면 역시 영제국 방어에 참여하는 것이 내 책무라고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인도가 영제국 안에서 영제국을 통하여만 완전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동지들을 될 수록 많이 모아 간신히 부상병 수송대에 종군할 승인을 얻었다. ... 우리 의무대는 대원 천백여 명, 간부가 40 명 가까웠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으로 일본에 협조했던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모두 친일 반역자로 분류된다.]
[어느 행군하던 날이] 찌는 듯 무더운 날이어서 모두 몹시 목이 말랐다. 도중에 목을 축일 만한 조그만 개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물을 누가 먼저 마실 것인가. 우리는 영국병사들에게 먼저 마시라고 했으나 그들은 먼저 마실 생각을 않고 우리더러 먼저 마시라고 권했다. 잠시 서로 상대방을 서로 먼저 마시게 하려는 즐거운 경쟁이 한참 벌어졌다.
[임성삼의 주(註); 일본군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영역을 가지고 상당한 기간 유지한 것은 무력(武力)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영국의 일반 병사에 이르도록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것 같다.]
p 149 위생 개량 운동
나는 언제나 쓸모 없는 단체의 일원(一員)이 되는 것은 견디지 못하였다. 단체의 약점을 감추거나 본체만체 하거나 혹은 결점을 고치지 않고 그냥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했다.
그래서 나탈에 정주(定住)한 이후 줄곧 나는 인도인 사회에 대해 퍼붓는 비난을 씻어보려고 애썼다. 그 비난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늘 들리는 비난이, 인도인들은 습성이 나태하고 집과 집 주면을 청결히 해 두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지들은 이미 자기 집을 늘 깨끗이 했는데 ....
[임성삼의 주(註); 우리나라의 도산 안창호 선생님(1878-1938)께서도 일본 점령기에 미국에 노무자로 간 우리나라 사람들과 처음 시작한 일이 사는 집과 동네 주변의 청소였다. 잘 살지 못하여도 청결한 주거구역을 만들어 미국 사람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을 변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쾌한 경험도 몇 가지 겪었다. 단체의 권리를 주장할 때는 그 단체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기가 쉽지만 그 의무를 수행케 하는 데는 도움을 빌리기가 쉽지 않음을 나는 알았다. 어떤 곳에서는 모욕도 당했고, 어떤 데서는 정중한 묵살(默殺)을 당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환경을 청결히 하기는 몹시 힘이 들었고, 하물며 그러기 위해 모금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임성삼의 주(註); 여러분은 앞으로 환경에 관계된 단체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위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민간 단체에서 단체의 이익을 위해 외부를 공격하는 데는 단체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내부적인 의무를 실행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이런 경험으로 나는, 무한한 참을성이 없어 가지고는 민중에게 무슨 일을 하게 할 수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개혁을 절감하는 것은 개혁자 자신이지 사회가 아니다. 개혁자는 사회에서 반대와 미움과 심지어 치명적 박해 외에는 기대해선 안된다. 개혁자가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는 것을 사회는 퇴보라고 생각하는 수가 없지 않다.
[임성삼의 주(註); 단지 자기들이 사는 곳을 청소하게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도 무한한 참을성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의 결과로, 인도인 사회는 집과 환경을 청결히 할 필요성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당국의 존경을 받았다. 내가 당국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우리의 권리를 역설하는 것을 일로 삼으나, 한편 그 못지 않게 자기 정화(淨化)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p 151 다시 인도로 [임주(任註); 1901 년으로 간디의 나이 32 세]
군무(軍務)에서 풀려나자 이제 내가 할 일은 남아프리카보다 인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할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이러다가 돈벌이가 내 본업(本業)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주(註); 돈벌이가 본업이 될 것 같아서 자리를 옮기는 이런 분이니까 나중에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즉 성인(聖人))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송별회가 여러 차례 벌어지고 값진 선물을 받았다. 금붙이 은붙이에 또 비싼 다이어먼드 패물까지 받았다.
이런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을까? 받는다면 또 내가 무보수로 거류민 사회에 봉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소송의뢰인이 준 몇 가지 선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순전히 거류민단을 위한 내 봉사 때문에 받은 것이다. 그리고 소송의뢰인들도 내 공공사업을 도와 준 만큼 이들과 공공사업 동지를 구분할 도리도 없었다.
50 파운드가 되는 순금 목걸이도 하나 받았다. 내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내 공공사업 때문에 받은 선물이니 다른 선물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선물을 받은 날 밤 나는 잠이 안왔다. 수백 파운드나 되는 이런 선물을 포기하기는 힘들었고 가지자니 더욱 힘들었다.
가지기로 하면, 애들과 아내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늘 봉사생활의 교육을 받아왔고 봉사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대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배워왔던 것이다.
우리 집에 값나가는 패물은 없었다. 식구들은 철저하게 간소한 생활만 했다. 그런데 어찌 금시계를 가질 수 있겠는가? 어찌 금줄을 차고 다이어먼드 반지를 끼겠는가? 더구나 보석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늘 역설(力說)하던 내가 아닌가? 지금 내게 들어온 이 보석들을 어떡하면 좋을까?
나는 이것을 갖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몇 분을 관리인으로 지명하고 이것을 거류민단에 기탁하기로 했다.
[임성삼의 주(註); 다음의 내용은 조금 길지만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분과 그 부인의 의견대립이 우리나라의 일상적인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답과 거의 같은 것이 신기해서이다. 단 간디와 완전히 동일한 주제로 부인과 이런 싸움을 하여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남자는 매우 희귀하리라 생각한다.]
다음 날 아침 아내와 아이들과 의논했다. 아이들은 곧 내 말에 찬성했으나 아내의 말은 달랐다.
"당신에겐 그것이 필요 없을지 몰라요. 애들에게도 필요 없고. 애들은 당신 말에 넘어가서 당신 장단에 춤을 추겠죠. 나더러 그걸 차지 말라는 당신 말도 알겠어요. 그러나 며느리는 어떡해요? 며느리는 그게 필요할 텐데. 또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요? 그렇게 정성껏 보낸 선물을 나는 절대 내버릴 수 없어요."
라고 말했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며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나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부드러운 말로 타일었다.
"애들 장가는 아직 일러요. 조혼은 안시킬 거요. 애들이야 자라면 자기 일을 자기가 꾸려가요. 패물 좋아하는 며느리는 맞지 않을 거구. 또 (당신이) 패물이 꼭 있어야겠다면 그때는 내가 있으니 사달라고 말하구려."
"사달래요? 이젠 나도 당신을 알아요. 내 패물까지 다 없앴죠. 내가 그런 걸 가지면 당신 마음이 편안하겠어요? 당신한테 며느리 패물을 사달래요? 아이들을 지금이라도 중으로 만들려구 하면서! 선물은 돌려보낼 수 없어요. 제게 준 목걸이인데 당신이 무슨 참견이에요?"
[임성삼의 주(註); 대부분의 남편은 이 정도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목걸이는 대체 당신이 일해서 받은 거요, 내가 일해서 받은 거요?"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이야기는 절대로 않아야 한다. 혹시 간디같이 성자(聖者)가 될 자신이 있는 사람은 가능할 지 모르나...]
"당신이 일해 준 거나 내가 일해 준 거나 마찬가지 아녜요? 나도 밤낮 뼈가 빠지게 고생했는데 그건 일한 게 아닌가요? 나한테 궂은 일은 다 시키고 눈물만 짜게 하고. 난 종처럼 일했어요!"
가시 돋친 말이었다. 마음에 찔리는 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패물을 돌려보내기로 한 내 결심은 서 있었다. 모든 선물은 다 돌려보냈다. 신탁증서를 작성하고 패물을 모두 은행에 맡기고 앞으로 내 뜻이나 관리자들 뜻에 따라 민단(民團)의 활동에 쓰도록 했다.
그 기금은 아직 예치된 채로, 필요시에는 활용되면서 정기적으로 늘어왔다.
나는 그 조치를 지금까지 한번도 후회한 일이 없고, 세월이 흐르자 아내도 그것이 현명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많은 유혹을 면했다.
[임성삼의 주(註); 실제로 한 번 큰 유혹을 뿌리치면 다음의 작은 유혹에 견디는 것은 쉽다.]
나는 지금도 공공사업을 하는 사람은 절대 값진 선물을 받아선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우리도 이것을 믿어야 나라가 잘 된다.]
p 156 국민회의(國民會議)
그 때가 1901 년이었는데 캘커타에서 국민회의가 열린 해였다. 물론 나도 거기 참석했다. 국민회의는 처음이었다. 넓디넓은 큰 천막, 당당하게 늘어선 지원 안내인들, 그리고 의석에 앉은 원로들은 나를 압도했다. 이 어마어마한 모임에서 내가 설 곳이 어딘지 자못 어리둥절했다. 의장의 연설은 책 한 권의 분량이었으니 그것을 끝까지 낭독할 수가 없어 몇 구절만 낭독되었다.
[인도의 유명한 정치가 '고칼레'와 간디가 친해졌다.]
고칼레는 그 무렵 늘 마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는 사정을 잘 몰라 나는 그에게 묻기를
"외출하시는데 전차를 타시면 안될까요? 그러면 지도자의 위신이 떨어집니까?" 그는 약간 괴로운 듯, 하는 말이
"역시 당신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내가 한 몸의 안락을 위해 국회의 수당(手當)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오. 당신이 마음대로 전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부럽지만, 난 그렇겔 못하오. 나처럼 이름이 널리 팔리면, 전차를 타고 다니기가 힘이 들지. 못할 건 없지만.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모두 한 몸이 편하려구 하는 건 아니요. 나도 당신의 검소한 습관이 좋아. 나도 될수록 검소하게 살아요. 하지만 어느 정도 비용이 나가는 게 나같은 사람에겐 불가피한 걸."
[임성삼의 주(註); 대부분의 나라의 보통 정치가들이 흔히 이렇게 말하며 일반 대중들 보다 편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생활을 한다.]
이제 그 사정은 알 만도 했으나 도무지 납득이 안가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허지만 선생님은 산보도 안하시니까 늘 잔병이 많으신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공직(公職) 때문에 운동할 시간도 없으신가요?"
"산보할 시간이 어디 있어야지."
납득이 안가는 대답이었지만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이기에 더 캐묻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식사할 시간 내듯 운동할 시간은 늘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해서 일할 힘이 줄기보다는 오히려 는다는 게 내 의견이다.
자리를 잡기 전에 나는 3 등차로 인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3 등차 여객들의 고충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 각 도시에서는 하루씩 묵었는데 보통 순례자들처럼 수도원 아니면 성직자의 집에 묵었다. 이전 여행엔 차비까지 합쳐서 3 루피 이상을 쓰지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뛰어난 분들의 공통점의 하나는 절약하는 습관이다.]
p 163 신앙의 시련
[간디의 열살짜리 아들이 급성 장티푸스에 걸렸다. 의사는 계란과 닭국을 먹이면 좋으리라 하였으나 생명이 위급한 때도 채식주의를 깨지 않았다. 아들은 묽은 우유로 회복되었다.]
p 168 다시 남아프리카로
[영국의 장관 체임벌린[임주(任註); 2 차 대전때 수상으로 유명한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에 의해 농락당한 체임벌린의 이복형이다. 1925 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이 남아프리카로 온다는 연락이 왔다. 남아프리카의 인도사람들은 간디가 도와주기를 원한다. 그는 그곳으로 간다.]
처자와 헤어지고, 자리잡힌 사무소를 그만두고 안정된 생활에서 불안한 생활로 옮아가기는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불안한 생활에는 익숙해 있었다.
세상에서 확실하고 안정된 것을 기대함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곧 진실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 모든 일은 불확실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확실한 존재이신 초월자가 숨어 계시다. 이 확실자를 발견하여 이에 의지하려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 진리,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선(善)이다.
제 4 편 형극(荊棘)의 길로 p 171
체임벌린씨가 온 것은 남아프리카 정부로부터 3천 5백만 파운드를 얻어 내고 또 영국인과 보어인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도인 대표를 냉대했다.
[임성삼 주(註); 이 체임벌린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는 인도 대표단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영국정부는 자치령 식민지에는 힘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의 불만은 알겠습니다. 나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여러분이 유럽인들 사이에서 살아가시려면 그 사람들을 잘 달래도록 최선을 다하셔야죠."
이 말은 대표단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셈이었다. 나도 실망했다. 그 말은 우리의 눈을 뜨게 했고, 나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체임벌린의 말엔 잘못이 없었다.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다. 힘이 정의(正義)라는 법칙, 무력(武力)의 법칙을 그가 좀 부드럽게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러나 칼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아니, 칼침을 맞을 용기도 힘도 없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체임벌린의 말은 사실 아래의 간디의 설명과 같은 것이다. 여러분은 체임벌린의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간디는 진실만을 우직(愚直)하게 추구하였으나 실무(實務)에 있어서는 매우 예리(銳利)한 감각과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분이었다.]
p 175 아시아 출신의 독재자들
[그 후 남아프리카의 아시아청(廳)에 근무하는 사람들과의 투쟁이 상당한 분량으로 펼쳐진다. 간디의 행동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청의 관리 두명을 형사(刑事) 고발한다. 완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죄판결을 받으나 아시아청에서는 해고되었다.]
그들은 내 반대만 없으면 시청에 취직될 기회가 생겼다. 그들 친구가 나를 찾아와 그런 사정을 말하기에 나는 방해 안하기로 약속했고 덕분에 그들은 채용이 되었다.
내 자세가 이러했기 때문에 나와 접촉하는 관리들은 아주 마음놓고 나를 대했다. 비록 내가 그 관리을 상대로 싸움도 많이 하고 심한 말도 했지만. 그들 자신은 내게 늘 친절했다. 이런 행동이 내 천성임을 그 때는 잘 몰랐으나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사탸그라하" 곧 무저항주의의 핵심이요, "아힘사" 곧 비폭력, 불살생의 특질인 것이다. ...
이 비폭력 불살생은 진실 탐구의 기반이다. ...
어떤 제도를 반대, 공격하는 것은 옳지만, 그 제도를 만든 사람을 반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반대 공격함과 다름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 결점은 피차 일반이고, 모두가 같은 하나의 창조주의 자녀요, 창조주의 자녀로서 우리 속의 거룩한 힘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인간을 괄시함은 곧 저 거룩한 힘을 괄시함이요, 따라서 그 인간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해치는 것이다.
p 187 인도여론
[1904 년 인도여론이라는 주간 신문을 시작한다. 간디는 자신의 사재(私財)에서 상당한 금액을 계속적으로 보태면서 이 신문을 유지한다.]
1914 년까지 10 년 동안 내가 감옥살이로 부득이 쉬게 된 동안을 빼고는 내 논설이 실리지 않은 인도여론 신문이 한 호(號)도 나온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 논설에 단어 하나라도 생각 없이 함부로 쓴 적이 없고, 일부러 과장해 쓴 적이 없고, 환심을 사려고 쓴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신문 창간 첫 달에 나는 신문사업의 유일한 목표가 봉사임을 깨달았다. 신문은 큰 힘이다. 그러나 분류(噴流)를 막지 못하면 온 집안이 침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붓대를 제어할 줄 모르면 파괴만 초래할 뿐이다.
외부에서 신문에 가하는 제어는 제어 안 하는 것보다 더 해를 미친다. 내부에서부터 제어를 해야만 이로운 것이다. 이 논리가 옳다면 과연 이런 기준에 합격할 신문이 세계에 몇 개나 있을까? 그러나 그 많은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신문을 누가 막을까? 그리고 그 판별을 누가 할 수 있는가?
선과 악처럼,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은 공존하게 마련이고 그 판별은 인간이 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언론의 임무와 언론의 폐해(弊害)에 대해서 상당히 생각한 것 같다.]
p 193 흑사병
[인도인 지구에 흑사병이 발생하여 환자들을 보살핀 이야기가 있다. 외부의 광산에서 감염된 사람이 23이었는데 결국 창고에서 치료하다가 20 명이 죽었다.]
이 구역 주민을 전부 철수시켜 약 3 마일 밖의 벌판에다 천막생활을 시키고 곧 이 구역을 불태워버리기로 결정되었다. 주민을 철수시킨 다음날로 이 지구(地區)는 불태워버렸는데 시당국은 그 화재에서 물건 하나 건져 줄 기색을 안보였다. 같은 시간에 시당국은 시장의 팔기 전의 재목도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돈으로 말하면 1만 파운드 가량의 손실을 본 셈이다. 시장 안에서 죽은 쥐가 몇마리 발견된 때문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것을 간디의 편에 들어야 할지, 시 당국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물건을 건지면 거기에 묻어있던 페스트가 퍼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p 197 가정살림
[이 시기부터 간디는 더 절약을 하는 생활로 들어선다. 빵을 만들기 위해 밀을 분쇄할 기구까지 구입하여 비용을 아낀다.]
'폴락'과 나는 애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에 관해서 열열히 토론한 적이 많았다. 인도인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갓나서부터 영어로 말하고 생각하게 훈련시킨다는 것은 자식과 조국을 배반하는 짓이라고 나는 늘 확신해왔다. 민족의 정신적, 사회적 유산을 애들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짓이요, 그만큼 조국에 봉사할 수 없게 만드는 셈이 된다. 이런 신념이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우리 애들에게 인도 말로 얘기했다. 폴락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애들의 장래를 망친다는 것이다.
그는 열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 주장하기를, 애들이 갓나서부터 영어 같은 세계어를 배우게 되면 후일 인생 경주에서 수월하게 남보다 앞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납득(納得)되지 않았다. 내 태도가 옳다는 것을 내가 그에게 납득을 시켰던지 혹은 내가 고집불통(固執不通)이라고 그가 손을 들고 말았든 것인지 지금 잘 생각이 안난다. 이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 후의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이런 내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내 아들들이 비록 충분한 글 공부는 못했지만, 그들이 타고나면서 배운 모국어 지식은 그들 본인과 그들 조국에 도움이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논쟁 후 거의 90 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간디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유는 다를 수 있다. 평범한 사람에게 두 가지 이상의 말을 일생의 초기에 가르치면 소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유태인은 거의가 여러가지 언어를 어렸을 때부터 배운다. 그리고 그들의 지력(知力)이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진실인가?
또한 과거 어느 나라의 지배층이 자기 나라가 점령당한 것이 아닌 때 다른 나라의 말을 초기부터 가르쳐서 그 나라의 국력이 융성해진 경우가 있는가? 한 나라의 일부 계층이 자기의 자식들만을 성공시킨 예는 있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1066 년 이후 점령당해서 할 수 없이 불란서 말을 배운 적이 있었으나, 그 이외의 불란서나, 독일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도 자기를 세계에 내 세울 수 있었다. 미국도 유럽의 문물을 들여오기 위해 상당한 사람들이 불어나 독일어를 배웠으나 어렸을 때부터 배운 적은 거의 없었다.]
p 201 줄루 부족의 반란
줄루 부족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신문이 전했다. 나는 줄루인들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그들은 인도인을 해치지 않았다. 반란이란 그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영제국이 세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충성을 바치고 있던 나는 영국이 잘 되기만 바랐다. 그러니 반란이 정당하냐 어쩌냐 하는 것은 내 결정을 좌우하지 못했다.
[임성삼의 주(註); 우리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백인들에게 수많은 차별을 당한 간디도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영국이 식민지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유지할 수 있었을 런지 모르겠다.]
나는 지사에게 편지를 보내, 필요하면 인도인 야전 위생대를 조직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뜸 이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회답했다. ... 우리 부대는 24 명.
담당 군의관이 우리를 반갑게 하는 말이, 백인들이 줄루인 부상자를 간호해주려고 하질 않고, 상처는 자꾸 곪아가고 해서 몹씨 딱하던 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죄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것이라고 우리를 반기었다.
줄루인들은 우리를 보고 기뻐했다. 백인병사들은 울타리 저쪽에서 우리를 넘겨다 보면서 상처를 돌보아 주지 말라고 야단들이었다. 우리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그들은 화가 나서 줄루인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임성삼의 주(註); 앞에서 백인들인 보어인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영국군이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흑인의 반란에는 태도가 변한 것이다.]
이들 부상자는 전투에서 부상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는 혐의자로 잡혀온 사람들인데 "맥켄지" 장군의 명령으로 매질을 당하여 심하게 다친 곳이 치료를 못받아 곪고 있었다. 또 일부는 우호적인 줄루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영국군이 적과 구분하기 위해 뱃지를 나누어주어 그것을 달았는데 영국병사들이 잘못 알고 쏜 것이었다.
[이 다음에 일차대전이 일어나자(1914 년) 간디는 인도인의 참전을 결정한다.]
제 5 편 영원을 찾아서 p 228
[임성삼의 요약; 진실을 찾는 운동을 인도에서 펼치고, 영국 통치의 부조리한 점 여러 가지 중에서 확실한 것을 한가지 잡아 그 현장에서 일 년을 머무르며 결국은 고치고 만다. 이 과정을 배울 것이 많다. 정치가들은 흔히 말만 하고 책임을 회피하나 간디는 가장 잘못된 것부터 시간이 얼마 걸리든지 확실하게 고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중요한 점인 것이다. 단지 과정이 길어 다 적을 수는 없다.]
p 254
나와 관리들 즉 세금징수관, 치안판사, 경찰국장과의 사이엔 일종의 우정이 싹텄다. 내게 보낸 통고를 내가 물리쳐도 불법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옳은 행동이었다. 이로써 내가 관리들 개인과 해보려는 게 아니고 다만 그 명령에 공적으로 반대하련다는 것을 관리들이 알았다. 이렇게 안심을 한 그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자기와 대립되는 사람들을 적으로 삼지 않을 정도의 아량이 있었다. 간디가 싸운 것은 영국의 제도였지 식민지 관리가 아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제도가 나쁘고 뇌물을 받는 공무원은 잘못된 제도의 희생인가? 실제는 그럴 수도 있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는 뇌물을 받지 못할 공무원도 주위가 부패되어 있으면 뇌물을 받게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제도를 정비하면 부패는 없어질 것인가? 모두는 아니나 상당한 정도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p 261 노동자들과 함께
[간디가 노동쟁의에 가담하였다. 사용자측은 중재의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계속하라고 했는데, 그 전에 직공들 및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그들에게 파업 성공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천명(闡明)했다.
1. 결코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2. 파업 방해자들을 상관하지 말 것
3. 동정금을 아예 기대하지 말 것
4. 파업이 아무리 오래 가도 흔들리지 말 것. 그리고 파업하는 동안 다른 정직한 노동으로 밥벌이를 따로 할 것
...
파업은 21일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나는 가끔 공장주들과 만나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라고 간청했다.
"우리도 우리끼리 한 맹세를 지켜야 합니다. 노동자와 우리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 (당신과 같은) 제 3 자의 개입은 참을 수 없소."
이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공장주들이 노동자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나 여러 나라에서 그 당시에 통용되던 개념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이탈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났다. 간디는 ]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해결이 나든가 공장을 영 떠나버리게 될 때까지 파업자들이 한데 뭉쳐 파업을 계속하니 못하면 나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겠어요."
[노동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치며 말렸다.]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간디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식을 시도한 첫 번째 일일 것이다.]
내 단식(斷食)에는 큰 결점이 없지 않았다. 나는 공장주들과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내 단식이 자연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공장주들의 잘못 때문에 단식을 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노동자의 대표로 내가 책임이 있으니까 말이다. 공장주들에게는 설득의 길이 있을 뿐이지, 그들을 상대로 내가 단식을 한다면 강압을 가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단식을 안할 수 없다. 그것이 분명 내 의무라 생각되었다.
나는 공장주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여러분의 입장을 포기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냉냉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는 내게 비꼬는 소리까지 했는데,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공장주들의 강경한 태도를 뒤에서 밀어준 주요인물은 '셰드 암발랄'이었는데 이 사람의 굳은 의지력과 맑은 성실성에는 존경이 갔다. 이 사람과 겨룬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니 단식으로 그 사람들 편에 압력을 준다는 것이 내게는 괴로웠다.
[임성삼의 주(註); 사람다운 사람과 겨루는 것은 즐거움이다. 단지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나 자신이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면 일생 이런 겨룸이 일어날 수 없다.]
p 272
겸손(謙遜), 예절(禮節)이 우리 (사탸그라하) 운동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임을 나는 체험에서 배웠다. 여기서 겸손, 예절이라 함은 그때그때 경우에 알맞게 고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고 타고난 착한 마음씨, 상대방을 좋게 해주려는 마음씨를 의미한다. 사탸그라하를 하자면 이 두가지가 따라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사탸그라하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다 이것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유명한 베짜기 운동을 시작한다. 1920 년 보다 상당히 전에도 인도에서 직물을 짜는 기계나 실을 뽑는 기계를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인도에서 직접 옷감을 만들어 입게되기까지의 어려웠던 이야기가 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뒤는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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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삼의 이야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내용을 추려보았다. 대부분 나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이야기들이다. 비록 번역본을 읽었으나 내가 느낀 것은 이 분이 평범하게 책이나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분이 아니라 날카로운 이성으로 모든 것을 분석하시는 분이며, 쉽사리 결론을 내리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물을 분석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나은 길을 찾는 방법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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