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추억];(14)장영희 서강대 교수 |
발행일 : 2004-04-29 A25 [문화] 기자/기고자 : 장영희 |
1994년 7월 17일, 속초로 휴가를 떠나셨던 아버지는 수영을 하시다가 심장마비로 사고를 당하셨다. 레비 혜성이 목성과 충돌, 목성 아래쪽에 큰 구멍이 뚫려 20세기 최대의 우주적 사건이 일어난 그날, 나의 우주에도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뚫렸다. 다음날 일간지에는 한국 영문학의 역사, 번역문학의 태두 장왕록(張旺祿) 박사가 타계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 사람의 인생을 요약하기에 꽤 화려한 타이틀이지만,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버지’라는 단어 석 자만큼 위대한 타이틀은 없을 것이다. 여섯 남매 중에 세 번째인 내가 첫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고열에 시달리는 나를 달래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벌떡 일어나시며 “아, 소아마비!”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나와 아버지는 그 어느 부녀보다도 더욱더 끈질긴 운명의 동아줄로 꽁꽁 묶여져 버렸다. 아버지는 내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남과 같은 교육을 받는 길뿐이라고 판단, 나를 장애인 재활 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는 일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러나 초등학교 이후 상급 학교들은 나의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치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일일이 학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사정하셨지만 번번이 ‘예의바르게’ 거절당했다. 아버지가 오실 때쯤 되어 문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시던 어머니, 거절당하고 어깨가 축 늘어져 들어오셔서 내 눈을 피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너무나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어렵사리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그야말로 산 넘어 산, 내가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대학들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내가 입학시험 치르는 것을 거절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갔고, 미국인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시고 “무슨 그런 질문이 있는가.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는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내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물어본 바보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행복한 바보가 어디 있겠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장난기마저 감도는 웃음을 띠시던 아버지, 그것은 마음 저 깊숙이 자리잡은 슬픔을 감추는 아버지의 멋진 위장술이었는지도 모른다. 광복 전 단신 월남, 이곳에서 자수성가하실 때까지 아버지의 삶은 끝없이 외로운 고투였지만, 지금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늘 그 선량하고 평화로운 눈매로 웃으시는 모습이다. 매일매일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힘든 일을 즐거운 일로 바꾸는 재주를 지닌 맑고 밝은 품성의 영원한 소년의 모습이시다. 아버지의 재능, 부지런함, 명민함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나지만, 신탁처럼 운명처럼 아버지가 가셨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겨 주신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 나가며 아버지의 영원한 공역자, 공저자로 남을 것이다. 영혼도 큰 소리로 말하면 듣는다고 한다. 늘 내 곁을 지켜주실 줄 알고 아버지 살아 생전에 한 번도 못한 말을 나는 이제야 크게 외쳐 본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 ◈장영희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친 장왕록 교수에 이어 부전여전으로 영문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상(1993년), 올해의 문장상(수필부문·2002년)을 받는 등 수필가·번역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에서 삶의 보석 같은 진리를 캐내는 글쓰기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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