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와 말하기
최동호
1.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능숙하게 일치시키는 사람이 유능한 시인이다. 생각에만 집착한다면 관념적인 시를 쓸 것이요, 말하기에만 집착한다면 요설적인 시가 씌어질 것이다. 느낌을 전환시키는 단계가 생각하기이며, 이 생각들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말하기다.
2 오세영 <그릇>51, 52, 53. 생각하기를 담는 독자적인 말하기 방법을 보여준다. 이 시적 틀을 완강하게 지켜주는 것은 어떤 독특한 시적 사유의 틀이다.
얼릴 수만 있다면 불은 아마 꽃이 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불길을 싸늘하게 얼린 튜립, 불은 가슴으로 사랑하지만 얼음은 눈빛으로 사랑한다. 어찌할거나 슬프도록 화려한 봄날에 나는 열병에 걸렸어라 추위에 떨면서 달아오르는 내 투명한 이성, 꽃은 결코 꺾어서는 안되는 까닭에 눈빛으로 사랑해야 한다 밤새 열병으로 맑아진 내 시선 앞에 싸늘하게 타오르는 한떨기 튜립 <그릇51>전문
시인은 불/얼음, 열정/이성의 대비를 뜨거움/차가움으로 치환시켜 마지막 행 '싸늘하게 타오르는 한떨기 튤립'에 집약시켜 명료한 시적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뜨거움에서 차가움에 이르는 과정은 '밤새 열병으로/맑아진 내 시선 앞에>와 같은 시행을 통해 적절한 시적 여과를 거친 까닭에 시를 읽는 독자에게 독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그러나 이 시는 생각하기의 틀이 너무 강력한 까닭에 말하기에 이르는 시적 전환이 유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수권의 <며느리밥풀꽃>,<향수>,<두 개의 도시> 등은 생각하기보다는 말하기가 앞섰다. 쓰라린 사연들이 유창한 말솜씨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쉽게 시의 문맥에서는 경험의 구체성이 집약되지 못하고 산만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이성복의 <붉은 돌>,<비애>,<손> 등은 짧은 단시들이다. 시가 짧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외연을 줄이고 내포를 깊게 하려는 화자의 숨은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붉은 돌, 붉은 돌 그대가 내게 남긴 말
붉은 돌, 붉은 돌 흐르는 강가에 머리 두고 긴 봄날 곤히 잠자는 붉은 돌
내 한철 쌓였던 시름 다 흘러가고 그대 향해 머리 둔 붉은 돌이며 이성복 <붉은 돌> 전문
붉은 돌의 심상은 선명하지만 그 행간의 비약으로 인해 이들 사이의 연관이 필연적인 것이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생각한 바가 의미의 지나치 농축으로 다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축약된 표현이 너무나 생각한 바에 잠겨 있는 탓이다. 무심한 돌멩이가 지닌 폭발적인 의미 발견을 노리고 있지만, 적어도 필자에게는 이들의 시적 연관이 적절치 않은 것같이 느껴졌다.
손, 타인의 손, 얼굴보다 더 늙은 손은 너의 가슴을 향해 온다 한번도 잡아주지 못한 손, 타인의 여윈 손 -<손>
얼른 보아 평범한 진술같지만, 자아와 타자 사이의 만남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적 통찰이 담겨 있다.
3
말하기가 지나치게 앞서면 수사만 요란하거나 목소리만 큰 시가 될 것이요,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골몰하다 보면 관념적 절대주의에 빠져 예술작품으로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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