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처럼 / 윤여홍
햇살도 건성으로 받아야 윤기가 난다
얼룩까지 지워지면 우리의 본색은 없는 것
서늘하게 달궈야 잘 익는 법
모과 그늘이 모과를 닮아 가고 있다
푸른 물감이 자욱하다
시고 떫은 잔광이 무게를 만들고 있다
모과가 땅으로 내리는 과단성을
40년 가까이 뜨락에서 지켜봤다
낡은 중절모처럼 처진 어깨를 딛고 내리는
낙과의 시간은 언제인가
반세기 적산가옥 낡은 기와가
또 한 번 금이 가는 세월의 중량
환절기처럼 철들어 가는 나의 정수리가 하얗게 말랐다
손톱으로 찍 누르면 아직 푸른 물기가 배어 나올까
허공에 무슨 흔적 남겼는지
흔적이라도 남겨서 허공을 쳐다보는지
모과처럼 부쩍 수상하다
가을 햇살이 건성으로 내 곁을 지나갔다
'다시 보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도 반쪽이다 / 유안진 (0) | 2008.11.14 |
---|---|
침엽의 생존방식 / 박인숙 (0) | 2008.11.14 |
꽃에게 기도하다 / 윤여홍 (0) | 2008.11.14 |
통점을 듣다 / 김영식 (0) | 2008.11.14 |
아내의 빨래공식 / 이기헌 (0) | 2008.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