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지나간다 / 천양희

문근영 2008. 11. 8. 21:28

지나간다 /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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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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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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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 외동 / 천양희

 

나는 오래 여기 서있었습니다 외동 1번지
다시는 저 다리 위에서 저 정거장엔

가지 않으리라
내려가서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리라
갈퀴별자리 옮겨 앉는 밤이면
네 청춘의 붉은 바퀴 굴러가다 멈춘 것

보입니다
가슴을 조금 움직여 두근거려 보지만
그 길 따라 오는 사람 있겠습니까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
세상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늙은 느릅나무 뒤에는 주름 진 황톳길이

구불텅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개들 옆으로
저 혼자 젖는 취객들이 많이
어두워져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나는
신열에 들뜬 듯 머리를 싸매고
풀섶에 우는 벌레들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다 적기로 합니다
산간벽지 떠돌다
잔가지 생잎 쓸린 잡풀들
몰래 숨어든 외동 일번지 느릅나무 곁에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시나무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이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 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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