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요, 정서의 창조에 핵심이 있다면
구체적인 자연이 시의 스승이지요.
왜냐 하면 시의 이미지를 자연에서 취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자연과 실제 사회에서 경험한 일을
자신의 시적 정서로 치환하여 유일한 가치를 이루고 또 하나의 정신세계를 넓혀주는 환희의 작업일 테니까요
즉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다가 자연의 현상이나 비의를 끌어넣어서 이 둘을 창의적으로 오버랩시켜 짜맞추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 연습함으로써
독창적인 시세계의 지평을 구축해나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글을 써요. 그게 버릇이 될 때까지 산골짜기에서 바다로까지 흘러가는 물의 법칙처럼 끈질기게 고독한 물줄기의 수행을 묵묵히 정진하는 것이 바른 글쓰기의 자세일 거라고 믿으며
다른이들의 몇 마디 조언보다 더 계율로 삼고 써왔어요.
선생님께 용기와 힘이 되는 말이면 좋겠는데요, 읽으셔서 닿는 내용이기를 빌며
고려대 영문과 김인환 교수의 평론에 '시의 눈'이 언급되는 관점에서 작품을 살펴보니, '이름 위의 지문', 선언되지 않은 연서', '명주실 끝의 팽팽한 그리움' 등으로 이미지 망을 구축하고 이에 '마음의 문을 열고' '외출 중'인 풍선은 구상된 시적화자롤 통해 작가를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품을 떠난 작품은 독자에게 권리를 이양되었음을 감안할 때, 작가는 독자의 비평을 받아들여야 할 문학예술적 의무를 긍정해야 한다.
1. '환히 부활하는'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한다.
2. 사랑의 부활이라는 카테고리로부터 현대를 살아가는 진정성의 고뇌를 인간주의적 비전으로 표상해냈다.
3. 다만 작가의 세계의식이 그닥 구상화되지 않아 순정적 탐미주의 선상으로 국한하여 감상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누구나의 괴뇌일 듯합니다. 앞날의 영광이 위즈위드의 '초원의 빛'처럼 흐드러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땅의 한 줄기 빛으로 밝혀질 그날까지 유유히 정진하시기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