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구름의 호적부
손택수
게을러터진 아버지는 내 출생신고를 이태나 미뤘다
나의 무정부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면사무소를 찾아가는 대신 나는 하늘과 땅에 출생신고를 했고
바람과 구름의 호적부에 먼저 이름을 올렸다
삼인산 너머로 지는 노을과
하늘을 아주 까맣게 물들이던 까마귀들이 나의
면서기였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어머니 등에 업혀 바라보던 꽃들, 별들
순간순간들이 나의 든든한 정부요 국가였다면 어떨까
출생신고를 미룬 그 이태가 나의
평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게을러터진 아비의 아들답게
사망신고를 미루고 미루면서
나는 아버지의 유골가루를 품고 다닌다
반은 어머니가 계시는 바닷가 언덕에 묻고
반은 삼인산에 뿌릴까 영산강에 뿌릴까
사십 년 만에 귀향한 고향의 느티나무에게 한 줌,
학교에 가지 못해 훌쩍거리며 걷던 논두렁에게도 한 줌
오매 저 냥반이 성식이 아닌가
엄니 대신 빨래 다니던 대추리댁 둘째 아닌가
수런거리는 대숲에게도 한 줌
세월아네월아 나도 한 이태쯤 이렇게 버텨볼까
지울 수 없는 바람과 구름의 호적부 속에서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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