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질문 (외 2편)
박성준
약국을 다녀온 뒤로 대낮에도 불을 켜고 삽니다 대문을 초록으로 칠했지만 좀체 좁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국물을 낸 멸치들은 버려집니다 액자를 떼어낸 자리처럼, 사는 동안의 냄새는 감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념이 되는 일들은, 전원도 켜지 않은 텔레비전을 오래 보고 있던 여자와 인사를 나눈다거나 간이 센 김장김치의 밀봉을 푸는 날처럼 그렇게 시작됩니다
달력은 아직까진 새가 아닙니다 장마철마다 손목시계에 성에가 끼는 이유도 마찬가지지요
그 아름답던 중국 여자는 도망을 갔습니다
밤새 비가 내린 천막 위에는 웅덩이가 생겼습니다 사내는 자신 있게 장대로 물을 쑤시고 있습니다
천막 아래에 너무 예의 바른 물들은 돌이 되곤 합니다
분위기
장수탕에 가면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어서 벗은 사람도 없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라커룸에 누군가 흘리고 간 양말은
주인이 없는 양말은 쓸모를 감당할 수 없는 한 짝
주인을 기다리지 않고 주인에게서 많이 멀어진
냄새를 쥐고 있다 싱크대가 무너졌다
집주인은 부재중이다
모르는 양말을 더 깊숙이 집어넣는다 내가 빌린
나의 라커룸에 다른 주인의 냄새가 돋아나 있다
나는 옷을 벗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옷을 벗었다 왜 부끄러울까
집주인은 성지순례차 충청도에 내려갔다는데
나는 성지가 없다 싱크대 상판이 무너져버렸다 옷을 벗고 나온
깨진 그릇들이 부끄러웠다
나의 라커룸에는, 내가 빌린 라커룸에는 내 옷과 뒤엉켜 있는
다른 주인의 발이 있고
무너진 싱크대를 물어내라는 집주인의 전화가 있다
장수탕에서 전화를 받은 내가 있다 나는 벗고 있었다 성지를 몰라서 홀딱 벗고
싸우고 있었다
양말을 한 짝만 신고 간, 주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순례를 아는 집주인은 부끄러움만 모른다 대체로 싸움에서
나는 이겨본 적이 없다
양말은 늘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기 어렵고
장수탕에는 사람이 없다 모든 우연은 해결이 되지 않는다
나는 장수탕을 가는 유일한 없음이다
그 옛날 혀가 되지 못한 냄새들
주먹을 쥔 손가락 속으로 들어간
손수건은 새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장막은 쳐지고 뒤엉킨 필름처럼
새는 혀를 갖고 있지 않아
또한 암전 속에서 우리는
입술 위에 올려놓은 지붕을 나눠 덮는다
주머니를 나누고
가격당한 손찌검을 나누고
너의 붉은 뺨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만 하니? 나비넥타이는
벌레였던 적이 없고 빈손에서 튀어나온
꽃가루들은 향기였던 적이 없으니
맹인이 된 여자가 어떻게 딱
거리를 알아채고 뺨을 때릴 수 있었는지
왜 아치형 새장을 보고 예배당에 조아린
벙어리를 생각하게 됐는지
나는 모국어를 사랑한 적이 없었으나
내가 배운 말이 나를 이토록 사랑할 줄이야
울렁거리는 시계추 앞에
좀처럼 말문이 막혀버리는 고립
눈 깜짝할 사이 홀연히 사라져
손수건으로 돌아간 새의 찰나를
여행이라 부르고 나면
나는 내게 잠깐 기대고 갔던 모든
기울기들을 대체 무엇이라 부르나?
모서리만큼 혀를 잃고
새처럼 부리를 벌려 밤새 종을 친다
그러나 종의 내부에는 공간이 없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마술처럼
—시집『잘 모르는 사이』(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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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 사회》신인상 시 당선. 2013년〈경향신문〉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몰아 쓴 일기』『잘 모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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