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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영숙 시집 『볼레로, 장미빛 문장』- 볼레로, 장미빛 문장 외 1편

문근영 2018. 12. 20. 02:29

볼레로, 장미빛 문장 (외 1편)

 

   정영숙

 

 

 

   1

   오르간 소리에 끌려 새잎 돋아나듯 여린 목소리로 계집아이에게 다가오던 발자국 소리 그렇게 소년은 긴 복도를 지나 태초의 울림처럼 그녀에게 왔다 순간 유리창을 튀어오르던 여름 햇살, 창문을 타고 학교 지붕 위로 다람쥐처럼 기어오르던 붉은 장미덩굴, 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페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장미꽃잎들, 붉게 춤추던 건반들 그 후로 소년과 계집아이는 늘 그때 본 풍경과 소리, 똑같은 테마를 장미빛 문장으로 악보에 옮겨 적었다.

 

   2

   몇 해 동안 붉은 장미꽃이 학교 운동장에서 저 혼자 피고 졌다 대학생이 된 소년은 하얀 아카시아 꽃을 꺾어 크레센도로 울리는 북소리를 담아 계집아이에게 주었다 달콤한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르던 열아홉 살 계집애 새처럼 날고 싶어! 새처럼 푸른 하늘을 날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점점 시들어가던 꽃! 아카시아 가시에 찔려 손가락 방울방울 맺히던 핏방울.

 

   3

   이제는 함께 날고 싶어도 북채가 없어 북을 치지 못하는 소년 그녀의 핏방울 속에 끝없이 돋아나던 원망의 가시들! 최초의 순한 소리마저 음을 잃고 핏빛으로 불타오르던 가시덤불 집! 불길을 잡을 수 없어 스스로 북을 찢고 귀를 막고 고도에 갇히던 소년 수십 년 팽이처럼 돌아가던 무음의 테마.

 

   4

   변하지 않는 건반의 배열처럼 잿더미 속에서 그치지 않던 오르간 소리 그 소리 따라 소년은 먼 길을 돌아 가시덤불 숲을 헤치며 왔다 변주된 악보를 가슴에 안고 우렁찬 북소리로 돌아왔다 40여 년의 막힌 길을 뚫고 손등에 박힌 세월의 굵은 못 자국을 지우며 최초의 소리, 떡잎 같은 연둣빛 계집아이에게로 돌아왔다 고향처럼 따스한 오르간 소리에 맞춰 큰 북을 둥둥 울렸다.

 

   긴 복도를 걸어서 오르간이 있던 시골 학교의 그 시간 속, 열다섯 살 가시내가 치던 건반 위로 돌아온 악보 낡은 건반 위에는 장미빛 문장들이 북소리에 맞춰 붉게 춤추고 있었다.

 

  ———

  * Bolero :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곡. 두 개의 주제와 리듬이 변하지 않고 악기 편성을 늘려가며 169회 반복됨.

 

 

 

검정칼새의 비행법

 

 

 

너는 절벽이다 절벽에 쏟아지는 폭포수다

 

검정칼새는 시속 170km 속도로

이과수 폭포를 향해 날아가 폭포 장벽을 뚫는다

온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수만 톤으로 내리꽂히는 폭포에 죽고 만다

 

너를 통과한다는 건 죽음을 담보하는 일이다

 

통과 직전 바로, 속도를 줄여 위쪽으로 상승하는 걸

잊지 말 것

그때, 잠시 너를 잊고 모든 감각을 열어 춤출 것

마지막, 물 흐름을 파악해서

물이 떨어지지 않는 지점, 실낱같은 사이로

순식간에 파고들 것

 

물 한 방울 날개에 묻히지 않고

물보라 속, 절벽 집으로 사라지는 검은 점 하나

우주의 리듬에 맞춰

행과 행 사이, 짧은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미끈한 말

그때 비로소 너와, 세계와 조우하는

 

네가 사라지고 나서야 폭포 절벽에 걸리는 무지개.

 

 

                          —시집『볼레로, 장미빛 문장』(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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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 194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교육대학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로 작품 활동. 시집 『지상의 한 잎 사랑』『물속의 사원』『웅딘느의 집』『하늘새』『황금 서랍 읽는 법』『볼레로, 장미빛 문장』.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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