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메뉴(외 2편)
최명란
죽은 내가 또 죽었다
어젯밤 꿈속에서 분명 내가 죽은 것을 보았다
내 주검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아쉬운 이별
아픈 이별
서러운 이별
미안한 이별
놀라운 이별
안타까운 이별
이별이 어떤 것이든 꿈보다 강렬하고 때때로 또렷하다
내가 죽어 내가 운다
전압의 불변
전구가 터졌습니다
방안이 고스란히 어두워집니다
누운 채 당신을 기다립니다
어두워야 보이는 나라의 당신이 점점이 다가옵니다
너무 오래 기다려 먼지가 된 당신이
내 주변을 돌기 시작합니다
깨알보다 더 작은 점들이
모래보다 더 많은 점들이 주변을 맴돕니다
점들은 제각기 표정이 다릅니다
이럴 때 난 꼭 까무러치고 맙니다
내가 점인 당신을 한 바퀴 돌려면 총력을 다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을 듣습니다
공부 안 할 거면 불 끄고 빨리 자라는 말은
부모들의 공통 언어입니다
당신의 아이는 울고 있나요 웃고 있나요
햇빛 속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찰랑이는
미루나무의 수많은 잎사귀처럼 당신이 점점이 반짝일 때
나의 밤은 먼지로 이루어져 검습니다
지퍼에게
내 몸은 언제나 당신의 정반대 방향에서 뜨겁고
잠이 깨면 당신과 나는 등과 등을 맞대고 있다
왜 그런가를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건 질문이 아니다
당신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별이 되는 동안
꽉 물리지 않은 나는 오늘도 혼자 고꾸라진다
당신은 정지되어 있고
나 혼자 늙어가다가 어느 날 문득
당신이 내게 나이를 물어온다면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처럼 살짝 수줍어질까
아귀를 꽉 닫아야 이빨이 더 단단해지는
지퍼가 지퍼에게
—시집『이별의 메뉴』(2015)에서
최명란 / 1963년 경남 진주 출생.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자명한 연애론』『명랑 생각』『이별의 메뉴』, 동시집『하늘天 따地』『수박씨』『알지 알지 다 알知』『바다가 海海 웃네』『해바라기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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