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귀가 없다 (외 2편)
노미영
슬픔은 귀가 없다
귀가 없어 울음은 짧지만 다짜고짜 들이덤벼
주위엔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다
이 고독은 징징거리는 아우성이다 아가의 발버둥이다
후려치면 손가락 마디에 피멍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 관절이 뻣뻣하다
만성 염증이라 항생제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여름엔 가려워서 긁다가 딱지가 앉는다
없는 귀를 만들어 달아도 고독은 완강하다
번역이 안 되는 문장들이 발뒤꿈치를 잡는다
깃털 같은 청세포들이 귓바퀴로 돌아나가서
슬픔은 오늘도 귀를 잡고 토끼뜀을 뛴다
낼 수 있는 소리는 콧소리뿐이라
사물은 콧김으로 익히고 단맛으로 고독을 달랜다
자신을 몰라주면 슬픔은 장난감 트럭을 집어던지고
마룻바닥이 패일 때마다 엉덩이를 한 대 맞은 다음
캐러멜을 하나 얻어먹고 나서야 잠깐 조용해진다
귀가 없으니 자꾸 이빨만 썩는다
그 고독을 달래려면 사탕수수 줄기밖에 길이 없다
도넛 같은 고독에 갇혀 그는 파란 색연필로 동그라미만 자꾸 그린다
슬픔은 그렇게 완벽한 구(球)다
햇살이 통과하지 않는 입체를 굴리며 그는 해시시 웃는다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공놀이,
혼자서도 신나게 가지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웃음만은 어째 길어 햇살, 햇살, 낭랑하게 웃는다
귀가 하나뿐인 짐승은 없어
슬픔은 늘 두 배로 흘러넘치고
식구들이 둘러앉는 식탁에는
미역 줄기 시금치 잎사귀 눌어붙어
나머지 귀가 자라기를 하얗게 염원하고 있다
물의 역사
1
페니실린은 나를 너무 오래 먹여 살렸다
죽은 피부들이 떠다니는 물의 횡격막에서
나를 들어올린 것은 어머니, 손
어, 쩌, 다,
머리 위로 날아오르던 나부(裸婦)들의 혓바닥
어머니의 가슴에 각질들을 게워내고
나는 아슴푸레한 물이 되었다
나를 빚어낸 것도, 부러뜨린 것도 물
물, 물, 신물의 역사
2
하늘이 승냥이처럼 찢겨 나가고
퉁퉁 불어터진 물 밑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올리는
물의 등뼈,
물의 발원을 삼키는 달은 알았으리
내가 마시고 뱉는 물이
씨앗 한 톨 터뜨릴 수 없다는 것을!
죽어도 온전히 썩지 못하리
들쥐로 환생할 당신의 이빨 밑에서
범람하는 타액으로나 떠돌,
죄가 깊어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나는, 오줌
부레옥잠의 말
슬픔과 물은 한몸이다
빛깔이 없고 향기가 없고 맛이 없는 몸
휘몰아치면 하늘과 땅을 호령하는 것도,
오래 고여 있다 보면 시큼씁쓸해지는 것도,
입술이 부르튼 슬픔이 강둑에 앉아
잠시 목을 축인다
목이 마르다
닻도 키도 필요 없는 이 여행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부유물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흐르다 보면
밑창은 저 하늘 멀리 물고기자리까지 흔들어
보이지 않는 것끼리, 어두운 것끼리
마음 포개고 숨을 고르면
부르르 떠오르는 영혼의 떡잎들
영혼에게도 우산은 필요하다
불어나는 슬픔을 걸러낼 수 없어
멍울처럼 퍼져 터지는 꽃잎들의 계이름을 받아쓰다 보면
향기로운 불행의 뒤태가 만져질 것 같아
물은 오늘도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고 또 빗으며
백야(白夜) 같은 슬픔의 뿌리들에게 입을 맞춘다
—시집『슬픔은 귀가 없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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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영 / 1971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교육대학원 졸업. 1995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일 년 만에 쓴 시』『슬픔은 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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