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치 (외 2편)
유현숙
1
청동도끼와 돌촉을 멘 남자가 집을 나섰다
협곡으로 들어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침엽수림 아래에서 목 긴 짐승이 오래 우는 밤
나는 숨죽이고 불면했다
터진 손으로 부싯돌을 치는 동안 지축이 기울었고 나무는 뿌리째 뽑혔고
눈 속에 파묻혔던 남자가 게놈분석으로 돌아왔다
눈두덩이가 패이고 붉고 서늘하다
갈비뼈 사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 듣는다 남자를 재웠던 내가 흘린 물소리다
잠든 동안 남자는 무슨 꿈을 복제했는지 별 조각 같은 아이들과 꽃잎처럼 흩어지는 手話와
짐승처럼 허기진 내 언어를 만났는지
윗 이빨에 눌린 혀끝에 눈물 한 점이 얼어 붙어있다
눈이 녹는 동안 새가 우는 동안 그런 만 년 동안
그리웠던 것은 마른 살갗과 살갗이 주고받은 이야기다
2
젊은 머리칼을 날리며 집을 나선 당신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지 외진 곡벽谷壁에 기대어 서서
여전히 궁벽窮僻을 꿈꾸는지
나는 지금 어느 골짝의 만년빙에 누워 등이 얼었는지
3
외치는 오래됐고 외치는 낡았고 외치는 헐었고 그리고
말랐다, 혀는 여전히 젖어 있다
———
* Oetzi : 1991년 북부 알프스에서 발견된 5,300년 된 미라.
최북의 눈에 내리는 비
조선 화가 최북은 제 눈을 찔렀다 고흐는 제 귀를 잘랐다 종신형을 살던 도니 존슨은 초콜릿을 개어 감옥에서 그림을 그렸다
폭풍설에 묻히는 산골의 긴 밤을 아이와 함께 걷는 풍설야귀인을
잘린 귀의 자화상을
초콜릿이 풀어낸 제 바닥의 색채를 그렸다
폭염을 걷던 어느 화가는 낯선 커피점에서 커피액을 찍어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암흑이건 소리 밖이건 갇힌 감옥이건 커피점이건 누군가 고독한 손길로 붓질을 하는 곳에는 빗소리가 들린다
해수관음이 바라보는 그 바다에서 범종이 운다
빗소리가 사라진 다음의 적막과 적막이 우는 공명이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단풍나무 숲길에 앉아 석류를 쪼갠다 붉게 물든 손가락을 본다
손가락이 붉어지는 동안
최북이 찌른 한 눈을 생각하고 한 귀가 잘린 고흐를 생각하고 도니 존슨의 감옥과 초콜릿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화가가 있는 작은 도시의 비 내리는 가을을 생각한다
불의 죄
—Beethoven, Piano sonata NO.14
오디오에 불을 지핍니다
진공관에 불빛이 차오르고 차오른 불빛이 마루에 쌓인 수북하던
어둠을 걷어냅니다
안마당도 삼나무 가지도 지난봄에는 무르고 연했지요
마룻바닥에 엎드린 내 등짝에, 뺨을 묻은 손등에
달빛은 참 푸른 음악입니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한 C#단조의 셋잇단음표들입니다
가고 없는 사람의 기록은 공간이기도 그 공간을 질러가는 불이기도 했습니까
지금도 곁자리를 비워 둡니다
그 불을 코카서스 산정에서 훔쳐 올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과 나란히 목침을 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달빛 소나타로 물들고 싶습니다
이생의 매일을 독수리 대신 당신에게 내장이 뜯긴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회향나무 잔가지가 붉게 타오릅니다
이곳은 프로메테우스가 사랑한 인간의 마을입니다
—시집『외치의 혀』(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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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 1958년 경남 거창 출생. 2001년〈동양일보〉, 2003년 《문학. 선》으로 등단. 시집『서해와 동침하다』『외치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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