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심훈문학상 시 당선작] 이재훈
굴 따는 노인 / 이재훈
새만금 방조제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햇살에 잘 버무려진 그 틈에서
굴 묶음을 손질하는 한 노인
언뜻 보기에도
바닷물을 머금은 굴 무게가 꽤 나갈 듯 보이는데
저 노인, 힘든 기색 하나 없다.
불어오는 해풍에 주름깊이 눅눅한 침묵을 닦아내며 오래, 말 없다
하늘 저쪽 몇몇의 구름들은 또 다른 이주를 서두르고
흘러들던 갈매기들 허공 깊이 정박한 채 꼼짝 않는다.
문득, 내 안의 가을이 새로운 궁리 속으로 스며들었음일까
지난 가을, 일교차가 몰고 온 외출들은 낡았다
그때 아직 나는 바다의 말씀에 귀가 밝지 못했으므로 미완이었다.
굴들을 키우는 건 단지 뭍으로 떠나지 못한 망설임들로만 알았고
또한 몇몇이 도시의 열망을 향해 고향을 등지는 동안에도
담배연기처럼 망각을 말리며 세월을 양식하던 저 노인의 생을
다만 부주의하게
어느 후미진 해변 식당에서 이방의 설레임으로만 덜어냈을 뿐
한결같음이라는 것, 그 만큼의 수확에 이르게 하는 눈부신 일임을
가을이 오고, 또 다시
아직 손대지 못한 바다의 페이지들이 해풍에 넘어진다.
주말, 나는 한 무리의 수런거림과 함께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누군가의 넋두리를 뒤로하고서
간기 잘 밴 새만금 갯벌의 등 굽은 말씀 하나 오래, 읽고 있다
심사평 빛나는 말의 꾸밈과 씀씀이
마침내 심훈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심훈문학상』이 올해부터는 시부문을 신설하게 되었다. 저 강점기에 쓰러져가는 겨레의 혼불을 밝혀들고 짓밟히는 나랏말씀과 나랏글을 소설과 시로 일으켜 세운 가운데 시「그날이 오면」으로 대표되는 심훈의 시는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우뚝한 봉우리 일뿐 아니라 세계시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불후의 명편이다.
제1회인만큼 홍보가 널리 퍼지지 않았음에도 전국에서 응모한 171편의 작품들은 대체로 고른 수준이었고 최종 결선에 오른 시편들은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글감에서부터 시적 형상화에 완성도가 높았다.
우수상 「굴 따는 노인」(이재훈)은 바다를 막아 갯벌 환경과 간척지의 쓰임새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새만금을 소재로 구성진 입담과 섬세한 현장 탐험으로 중량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양식장에서 키운 굴을 따는 노인을 대상으로 화자가 관찰하는 눈매가 매섭다. “불어오는 해풍에 주름 깊이 눅눅한 침묵을 닦아내며 오래 말없다” “담배연기처럼 망각을 말리며 세월을 양식하던 저 노인의 생을‘의 대목에서 말의 꾸밈과 씀씀이가 빛나고 있다. 화자가 시의 전면에 나서서 ”간기 잘 밴 새만금 갯벌의 등 굽은 말씀 하나 오래 읽고 있다“는 끝맺음이 이 시인의 시적 역량을 증거해 주고 있다. 대상과 우수상 사이에서 몇 번의 저울질 끝에 우수상으로 한 등급 낮춘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으로 「주치아 할머니의 무위농원」(이명), 「체부동 백사십 사번지」(황진비), 「발코니」(변삼학), 「당산나무」(정지윤) 등이 각각의 어법과 감성으로 시적 긴장감을 보였음을 부기한다.
심사위원 이 근 배, 홍 윤 표, 정 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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