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제15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문근영 2018. 10. 23. 03:34

미시감(未視感, jamais vu)*

  오 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울며불며 매달린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없던 법이 생기던 순간,

몸이 무너졌다

마음이 무너졌다

폭삭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서툴렀다

사람이 사람을 에워싼다

둘러싸는 사람과 둘러싸이는 사람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어색해한다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하다​

​여기서 울던 사람이

길에 매달려 가까스로 걷는다

집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안녕

어떤 말들은 안녕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은 멀쩡하기 위한 거지

겨우내 겨우 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봄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푹푹 꺼지는 땅 위에 사람이 서 있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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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감(旣視感, dèjà vu)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실제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듯이 느끼는 기억 착각을 의미한다.

 

 

                       —제15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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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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