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
김나영
오랫동안 나를 떠나지 않는 이름 하나 있지
죄와 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이었던가
푸른 눈의 혁명가 이마에 키스를 할 무렵이었던가
그 도서관에서 우리는 눈을 맞췄지
때마침 화단의 맨드라미는 미친 듯 타올랐고
청춘을 장전(裝塡)한 우리는 두려울 게 없었지
사랑과 혁명을 도모하기에 우리는 충분히 위험했지
그때 '종욱'이었던가 '진욱'이었던가 '동욱'이었던가
혈기왕성하던 다혈질의 나와 함께
청춘백서를 필사하던 '욱'
체크남방 안에서 키우던 근육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쯤 착한 여자 만나 조용히 잘 살고 있을까
그를 이제 내 품에서 해방시켜줘야 할텐데
뾰족하던 그의 정신에도 둥글둥글 살이 붙어
적금통장 부풀리는 일에 전력질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
사회적 동물이란 말을 그리 실천하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
TV를 켜거나 신문을 뒤적거리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흑백에서 컬러로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이라고
그가 내게서 와락! 돋아난다
푸른 주먹을 불끈! 쥔다
겉이 아니라 속을 바꿔야 한다고
내 안에서 수없이 종주먹을 꺼낸다
세상을 향해 '욱' 어퍼컷을 날린다
—제1회 전국계간지작품상/ <다층>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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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 1961년 경북 영천출생. 1998년《예술세계》로 등단. 시집 『왼손의 쓸모』, 『수작』. 현재〈다층〉동인, 한양대 출강.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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