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실천문학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전욱진
안테나
지금껏 옥상에서 살았는데 녹슨 손잡이가 달린 그림자가 가끔 뛰쳐나왔다. 지구의 출근 제도는 아마 태양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아침엔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너는 오랫동안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다. 뼈가 수신한 채널 하나를 종일 보았다. 누가 보든 상관없이 방영되는 비정규 채널 아랫집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잠은 간단한 음소거였다. 너는 리모컨을 찾으러 갔다 돌아오지 않는다. 뼈가 구겨질 때마다 분명한 악몽을 꿨다. 이 세상 모든 옥상의 흐린 내일에 관하여 뼈는 지금 공중을 수신하고 있다. 그림자가 도시와 한 몸이 되자 바쁘게 혈관을 통과하는 자동차 불빛. 내일이면 장기(臟器)들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이다. 내 그림자에서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철거해야 하는 감정들이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옥상의 구식 안테나에 새들이 착륙했다. 이곳이 경유지인 것을 너무 늦게 눈치챈다.
줄 타는 옷
엄마는 마당을 가로질러 줄을 매고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옷가지들이 줄을 탔다.
맑게 갠 날을 잡아당기면 검고 긴 줄이 팽팽했다. 나는 그 줄을 밟고 옷가지들의 그림자 위에서 무등을 타고 놀았는데 눈을 뜨니 나는 객지(客地) 위였다. 그때부터 자오선을 마음으로 가졌다. 칼자국을 밟고 놀았던 발로 줄을 탔다. 칼의 주인은 기우뚱거리는 중심, 몸을 흔들 뿐이었다.
어쩌다 집에 들르면 엄마는 객지를 빨아 또다시 긴 줄 위에 널었다. 실패한 어름사니는 빨랫줄만 봐도 현기증을 느낀다.
상의와 하의는 이미 경지에 오른 듯 편해 보이지만 그건 내가 나의 관객일 때다. 툭툭 털어 옷을 걷으면 발목 근처나 소매가 파리하다.
두 개의 극. 양쪽에 묶인 것들은 흔들린다. 줄을 타는 해. 그림자가 섞이는 줄 위 곡예사들이 마른다. 밥처럼 차가운 날씨다. 몸이 다 마를 때까지 망중한 없던 바람. 텅 빈 빨랫줄에 근황을 널어놓는다. 기시감은 펄럭거리면서 말라간다.
그림자가 없는 날은 공연하기가 꺼려진다. 미신은 늘 미끄럽다. 그런 날은 모든 줄이 외줄이 되었다. 줄을 탈 때 바닥에 허우적대는 내 그림자를 동경했다. 무수한 균형들을 털어낸 몸이 마른 광대가 될 수 있었다. 곧 얼음 위를 걷는 계절.
빗방울 떨어지고 객지에서 내가 나를 갠다.
어우야담
보낸 편지는 자꾸만 되돌아왔다.
깨어나면 다시 잠들 수 없는 지병을 가진 당신,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헤어진 애인들이 침대 밑을 기어 나오기 전에
당신의 그림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당신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소지를 잊은 편지가 되는 것
불안을 심장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홉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키우는 중년의 남자부터 기침약 공장에서 일하지만 늘 기침을 달고 사는 소녀 슬퍼하는 개를 닮은 수습 수의사 요즘 면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노인 잃어버린 발뒤꿈치를 찾아 배회하는 아가씨 가로등에 붙은 청테이프를 매미라고 우기는 꼬마까지 모두 같은 노래를 흥얼거린다.
여러 개의 쇠구슬이 일정하게 부딪히는 심장 소리
어쩌면 이미 뜯어진 무언가를 봉합하는 재봉틀 소리
아침은 고장 난 자전거라는 듯
지붕 위 암탉을 꺾어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종족의 축제엔 금속을 먹는 풍습이 있다.
토끼 우리 반대편 당신이 사는 집
그림자는 당신을 기다리다 먼저 잠들었다.
달은 떠나고 달빛만 남아 있다 토끼들이 전부 사라졌다.
마을의 풍향계는 오후의 바람과 맞바꿨다.
당신은 지금껏 깨어난 적 없다.
중국 속담
-부족한 한 개의 손가락과 남겨진 귀
여섯 개의 귀로 저녁이 드나든다.
태양의 뒷덜미가 점점 늘어나고 천막 꼭대기에서 지는 해
선잠에선 불타는 동쪽을 꿈으로 꾼다.
내 시간은 늘 앞에 있다.
괴상한 꽃으로 머릴 반쯤 덮은
말이 문득 여섯 갈래로 나뉘는 장면들 그리고
탄성과 조소, 혐오를 가지고
저글링을 하는 여덟 시.
손가락들을 따라 마을을 떠도는 나는
귀가 많은 지붕
배고픈 날 뛰어가는 푸른 구름을 잡아서 빨아먹거나
내겐 있지도 않은 이름을 만들어 먹었다.
해를 따라 지는 꽃의 꽃말로
일요일의 악담을 만들었다.
마을은 뒤통수들이 살고 있다.
전날 모아놓은 손가락들 뜯어 먹었다.
그러다 잠에 들면 속담처럼 눈을 뜬 새벽 비가
내 옆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쇠약한 몸을 반기는 귀와 손가락
젖은 몸을 채 말리기도 전 천막을 나온다.
땅거미에 쫓기던 달팽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가고
착각한 바람과 이정표가 울렁거린다.
여덟 번의 종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여섯 개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해를 따라 꽃이 진다는, 누군가가 중국 속담을 말했었다.
전욱진 *1993년 경기도 용인 출생.
《실천문학》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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