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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7회 시작작품상 수상작

문근영 2018. 10. 23. 03:34

제7회 시작작품상 수상작

  물속의 눈보라

        박진성​

 

 

  ​우리는 가만히 앉아 손톱 사이로 들어오는 세계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거울 속엔 눈보라, 그리고 걸어가는 사람들 천천히,

  ​몸이 없는 바람과 마음이 없는 유리 그리고 밤하늘을 데려가는 별자리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어제 죽은 사람은 모두 서른일곱 명, 유리에 붙어 우릴 보고 있는 좀비들, 자, 우리의 손톱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손가락이 모자라요

  노래는 넘치죠

  ​시계는 시계의 세계에서 돌고 우리는 시간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림자를 데리고 사라진 태양에 대하여,

  ​속눈썹에 앉아 있는 세계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거울 속엔 여전히 눈보라, 그러나 갈 곳이 없는 식물들, 다른 피로 모든 곳을 갈 수 있다고 다른 피로 당신은 말하겠지만

  ​물에서 녹는 긴 긴 눈, 청어보다 더 푸른 것들에 대해 말하면 안 되나요

  ​청어가 좋아요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긴 긴 지느러미들, 우리가 물속에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안 되나요 구멍은 없어요 우리가 구멍이니까요 흐르는 흐르는 물속의 눈보라,

  ​물속에서 다 녹아 버린 눈들에 대해 우리는 말하면 안 되나요

 

 

 

                        —《시작》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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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1년 《현대시》를 통해 시 등단. 시집『목숨』『아라리』『식물의 밤』, 산문집『청춘착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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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작작품상은 지난 한 해 동안 <시작>에 발표된 시편들을 대상으로 한다. 원로에서부터 신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들이 우리 잡지를 빛내 주었다. 오늘날은 장 보드리야르(Jean Beaudrillard)의 지적처럼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가 현실화된 것이 사실이다. 생산 시스템, 정보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등이 모두 과잉을 갱신하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의 비만은 소통과 편리보다 혼란과 단절의 ‘고독한 피로’를 불러오고 있다. 이런 때에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고 주장하지 않기 위해 주장하는 의기소침하고 내성적인 시적 체질의 소통이 오히려 실질적인 공감과 연대와 정화의 가능성을 지니지 않을까? 지난 한 해 <시작>에 발표된 시편들을 다시 읽어 나가면서 이런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피로사회’를 위무하고 치유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무위, 영감, 영성의 지평을 열어 나가는 가능성으로서 시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심사 위원들은 정재학의 <샤먼의 축제> 연작, 신동옥의 <비트> 연작, 전형철의 <저수지와 케이크>, 박진성의 <물속의 눈보라> 등에 주목했다. 제각기 ‘남다른 영혼’의 세계를 독특한 시적 정조와 화법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정재학은 김대례 일행, 이완순 소리의 <진도 씻김굿>을 내밀한 모던적 감각으로 이채롭게 노래하고 있고, 신동옥은 “격발의 음악”이 그리는 “아름답고 불가사의한 지도”의 환정적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횡단하고 있다. 전형철은 고전과 현대의 어법을 종회무진하며 특유의 의표를 찌르는 상상력과 묘사력을 보여 주고 있다.

 

   심사 위원들은 제각기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평가하면서 박진성의 우주의 비의를 향한 주술적 열림의 언어에 수상의 영예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의 <물속의 눈보라>는 ‘물속’에 ‘눈보라’가 존재하는 비경을 중층적 상상과 몸의 감각으로 전언한다. 그는 중층적 상상을 통해 세상 속의 또 다른 세상의 심연을 감지하고 이를 시각이 아니라 섬세한 손톱의 촉감으로 읽어 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에는 비가시적이고 비선형적인 세계가 들어와 서로 엇섞이고 충돌하고 활성화하는 풍경이 더듬어진다. 물과 눈, 액체와 고체, 삶과 죽음의 역설적 통합이 불협화음의 미의식 속에서 서로 연속성을 이루며 절묘하게 개진되고 있다. 특히 회화체의 통사 구조가 지닌 시적 소통과 공감의 감응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박진성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더욱 크고 깊은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 위원|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이현승 이찬 임지연 홍용희(글)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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