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목민심서』와 다산, 그리고 호남지방

문근영 2018. 5. 31. 05:49

다산 정약용은 전후 18년 동안 호남의 강진 땅에서 유배살이를 했고, 이곳에서 그의 3대 저술을 완성하였다. 호남과 맺은 그의 인연은 대단히 컸고,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다산의 저술들은 대부분 ① 직접 목격하고 겪은 체험에 토대하여, ② 범인이 지닐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경지(식견)에서 정리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즉 그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것은 결국 대부분 호남의 사정이며, 실제 지역을 호남으로 밝힌 경우가 매우 많다. 다산이 그의 연보에서 여러 제자들 가운데 “경전을 열람하고 역사서를 탐색하는 자가 두어 사람, 부르는 대로 받아쓰는데 붓 달리기를 나는 듯 하는 자가 두세 사람, 손을 바꾸어 가며 수정한 원고를 정서하는 자가 두세 사람, 옆에서 거들어 줄을 치거나 교정·대조하거나 책을 매는 작업을 하는 자가 서너 사람이었다.(丁奎榮 編, 『俟菴先生年譜』(丁茶山全書, 문헌편찬위원회, 1961)”고 밝혔듯 그의 저술 과정에는 옆에서 돕던 제자들이 십수 명 있었고, 이는 마치 전문 편집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작업하는 모습과 같았다.



다산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주변의 사회상을 결코 소홀히 지나쳐 버리지 않고 이를 소상하게 기록에 남겨 놓고 있다. 목민심서의 사례 예시 중에는 그래서 강진, 혹은 호남의 사정과 실제 체험들이 매우 많이 수록되어 있다. 다산이 스스로 『牧民心書』 自序에서 밝혔듯이 “처한 위치가 비천했기 때문에 듣는 바가 자못 상세하였으며”, 이를 “종류에 따라 설명 기록”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태로 목민서는 저술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산의 목민서 중에는 다산의 이러한 체험들을 모았던 저술들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예컨대 寒巖話, 茶山筆談, 茶山錄 등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다산의 목민서에 보이는 각종 예시 자료들 중에는 물론 중국의 여러 책자들이나, 우리의 각종 사서에서 광범한 자료를 표집·동원한 박학다식으로 다산다운 특징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호남에서 직접 체험한 내용들이 매우 많다는 점도 우리는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산의 현장 체험이나 현실비판의 근거 자료들이 과연 지역지식인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혹 호남지역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온축시켜 온 사고와 의지가 다산에 의하여 결집, 종합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산은 Leader로서 주위에 모인 이들 비판적 지식인群에 의해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토론하면서 저술을 완성한 것이리라. 이와 관련하여 임형택은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라는 글에서 강진시절의 제자들을 “茶山學團”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라 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호남 실학의 분위기는 다산 이전에 이미 숙성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예컨대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은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강남악부와 승평지를 편찬한 일이 있었고, 1653년 표류되었다가 붙잡힌 화란인 하멜 일행은 탈출할 때까지 무려 10여 년을 여수, 순천, 남원 등에 살면서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주목사의 아들이었던 담헌 홍대용은 그 인연으로 혼천의와 자명종같은 과학지식에 눈을 떴고, 고향에 籠水閣이란 사설 천문대를 만들었다. 동복사람인 규남 하백원은 자명종과 양수기, 방적기 등 6-7가지의 과학기계를 만들어 실생활에 사용할 정도로 조예가 있었고 천문도와 동국지도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순창의 여암 신경준과 고창의 이재 황윤석은 전북 지역의 재야 실학자로 지리학과 언어학, 산술서 등에 조예를 보였다. 또 장흥의 재야 지식인 위백규는 「정현신보」와 「만언봉사」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모순을 지적하고, 그 개혁론을 제시하였고, 『환영지』라는 세계지도와 해돋이 같은 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관리들의 부패와 각종 제도의 문란상을 40여 조목으로 세분하여 매우 혹독하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산 정약용은 위백규가 죽은 뒤 2년 만에 이웃한 강진 땅으로 귀양 와서 18년을 지냈던 것이니, 그의 개혁사상 형성에 이러한 호남지역의 여러 실학적 분위기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산의 실학적 저술에서 이러한 주변 인사들의 영향과 협조는 매우 중요하다. 부연하면 다산은 호남에 客으로 와서 主人이던 호남의 학자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경륜과 포부를 십분 발휘한 인물이었고, 그가 그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당 시대 호남인들의 정신적 분위기와 기대가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때로 다산이 만약 호남이 아닌 영남이나 관동지방으로 유배되었더라도 과연 그와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것이 강진이나 호남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면 이는 다른 어느 사실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사상사적 의미와 가치가 당 시대 민중의식의 대변이었음에서 진가를 발휘하듯, 우리는 다산의 주변에 있었던, 혹은 그 이전부터 실학적 분위기를 성숙시켜왔던 이들 호남 재야 지식인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나는 다산과 이들 향촌 지식인의 모습 속에서 현대의 지성적 문화인의 역할을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수준 높은 도덕성, 폭넓은 지식, 그리고 냉철한 현실 비판과 참여정신으로 실천을 행한 사람들이었다. 부연하자면 그런 모습에서 우리의 <도덕적 지성인의 像> <현실 변화 대응·참여의 진취비판적인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들이 과거사회를 이끌어 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 경험의 철학을 배우자고 제안하여 본다.


이해준(공주대 사학과 교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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