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후일담
이병일
밤새도록 깨어있는 여우는 달이란 유골단지를 파헤쳤지만
오소리굴과 지네와 독초와의 놀이는 까맣게 잊지 못했다
코밑과 털끝과 첫 발자국의 힘줄이 거뭇거뭇해질 때
아직 운명은 툭툭 피와 오줌으로 영역을 긋고
꽃가루 냄새 틔우는 검은 아랫도리를 잠그지 않았다
산앵도나무 꽃잎이 땅 그늘에 산불을 지르듯
불길 높이로 꼬리를 벗어던지는 설화 속에서
여우는 피범벅이 된 턱뼈로 컹컹 봄밤을 떠오르게 했다
저 심산유곡 앞에서 여우는 귀를 꼿꼿하게 깎는다
이끼 낀 조약돌을 밟듯 그냥 침 한번 삼키고
물소리에 젖어 녹는 발자국이 북쪽으로 가고 있음을 안다
뱀 껍질 언뜻 비치는 환한 달밤
여우는 발자국도 없이 산앵도나무에 달린 것을 물고
다시 겅중겅중 환생해도 즐거울 것은 없었다
무심코 만져지는 아홉 개의 꼬리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으니까
—《포지션》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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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2007년 문학수첩신인상에 시「가뭄」 외 4편이,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견딜 수 없네」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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