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 깊이
최지하
비린내는 하얗다
칼의 지문에 가려져 알 수 없는 깊이
날마다 도마 위에서 핏줄 불거지던 날것의 계절들은
마침표가 없는 당신의 이야기가 되었다
당신에겐 없다고 믿었던 울음이 쓰이던 날
우리는 농담을 하며 새 안경을 사고
한 줄씩
공들여 마친 당신의 그리움을
우연히 도착한 비라고 가볍게 옮겨 적었다
당신의 발자국에서 매일 커지는 발
그곳에서 바다는 시작되었는데 바다는 언제나 멀었다
바다는 먼 곳만 있었다
당신의 손가락에서 규칙적으로 피는 꽃잎을
여섯 번째 불가능에 속한 순간을
계절을 나기도 전에 가장 먼저 손에 닿는 식탁에 놓아주었다
당신을 넣고 닫아 버린 문장엔 한 개의 부호도 없어
비린내와 향수를
분별해 읽을 수 없었다
그물에 걸려 퍼덕거리는 바람은 당신의 두 번째 배경
한 방향으로만 어두워지던
당신이 펼친 우산을 십 년 후의 각도로 돌려놓고 우리는
당신이 보는 것과 다른 것만 보았다
마침내
도시에서 옆모습을 씻는
우리에겐 기적처럼 비린내가 났다
바다의 첫 문장을 손질하는 당신 손의 새벽처럼
—계간《문예바다》2017년 여름호
-------------
최지하(崔智河) / 1960년 충남 서천 출생. 2014년 〈무등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낙심(落心) / 이덕규 (0) | 2017.09.07 |
---|---|
[스크랩] 모르는 사람 / 김나영 (0) | 2017.09.07 |
[스크랩] 가출 / 김휴 (0) | 2017.09.07 |
[스크랩] 별의 탄생 / 권운지 (0) | 2017.09.07 |
[스크랩] 동사한 빨간 장미 다발 / 김금융 (0) | 2017.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