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손의 깊이 / 최지하

문근영 2017. 9. 7. 01:18

손의 깊이

 

   최지하

 

 

 

비린내는 하얗다

칼의 지문에 가려져 알 수 없는 깊이

 

날마다 도마 위에서 핏줄 불거지던 날것의 계절들은

마침표가 없는 당신의 이야기가 되었다

 

당신에겐 없다고 믿었던 울음이 쓰이던 날

우리는 농담을 하며 새 안경을 사고

 

한 줄씩

공들여 마친 당신의 그리움을

우연히 도착한 비라고 가볍게 옮겨 적었다

 

당신의 발자국에서 매일 커지는 발

그곳에서 바다는 시작되었는데 바다는 언제나 멀었다

 

바다는 먼 곳만 있었다

 

당신의 손가락에서 규칙적으로 피는 꽃잎을

여섯 번째 불가능에 속한 순간을

계절을 나기도 전에 가장 먼저 손에 닿는 식탁에 놓아주었다

 

당신을 넣고 닫아 버린 문장엔 한 개의 부호도 없어

 

비린내와 향수를

분별해 읽을 수 없었

 

그물에 걸려 퍼덕거리는 바람은 당신의 두 번째 배경

 

한 방향으로만 어두워지던

 

당신이 펼친 우산을 십 년 후의 각도로 돌려놓고 우리는

당신이 보는 것과 다른 것만 보았다

 

마침내

도시에서 옆모습을 씻는

우리에겐 기적처럼 비린내가 났다

바다의 첫 문장을 손질하는 당신 손의 새벽처럼

 

 

 

                      —계간《문예바다》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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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하(崔智河) / 1960년 충남 서천 출생. 2014년 〈무등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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